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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언니 Oct 02. 2024

나이가 든다는 것 1

몸이 나를 압도하는 시간

 최근에 몇 권의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다가 멈추기를 반복한다. 한 권의 책을 한 호흡으로 읽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데 이처럼 산만한 독서습관은 노안이 오면서부터다. 마흔 중반을 넘기자 찾아온 노안으로 다초점 안경을 썼으나 무용지물, 그냥 안경을 벗고 책을 읽는다. 그러니 눈이 쉬이 피곤하고 집중도 어렵다. 그림을 그릴 때도 안경을 썼다 벗기를 수시로 반복한다. 젊은 시절보다 두 배 가까운 시간을 들여야 비슷한 생산력이 나온다. 공부머리는 별로였지만 기억력은 무지하게 비상했는데 이젠 극사실주의 같던 기억력도 느슨해졌다. 젊은 동료들과 단톡방에서 소통할 때는 그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나보다 몇 배는 빠른 타자속도로 올라오는 메시지를 다 읽기도 전에 연이어 계속해서 다른 메시지가 좁은 핸드폰 화면에 올라온다.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 스크롤을 올려 최초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다른 이들이 덧댄 의견까지 읽어야 나 혼자 딴 소리를 하지 않는다. 가끔 출력해 오는 자료의 글자 포인트가 너무 작아 불편하다. 가로 출력해서 두 쪽을 한 장에 해오는 젊은 그들의 무심함이 서운하지만 에너지 절약을 탓하기도 애매하다.  


 내 몸의 기능이 노화되어 가는 걸 여실히 실감한 건 완경 이후였다. 당장 어깨가, 무릎이, 허리의 통증이 자주 찾아왔고 발뒤꿈치가 아파 오래 걸을 수가 없었다. 점점 살이 불었고 날랜 몸태는 사라졌다. 55 사이즈에서 77 사이즈로의 변화는 그렇다 쳐도 감정이 자주 오르내렸다. 말로만 듣던 갱년기 증후군이었다예민하고 자주 불안해하고 까탈 맞은 기질을 타고났지만 잘 웃고 명랑한, 내 딴엔 사회적 가면을 쓰고 예민함과 명랑함 사이를 적당히 오가며 살았다. 그러나 여성호르몬이 감소하자 이 사회적 가면은 헐거워졌다. 수시로 열이 오르내리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며 심장박동이 롤러코스터를 탄 거처럼 훅 치솟다가 급강하하며 툭 떨어졌다. 잠자리에서 진땀을 쏟다가 연이어 심장이 쿵쾅거리면 숨이 막힐 거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머리로는 금방 지날 갈 것을 알지만 무서웠다. 양방과 한방의 의사들 모두 여기서 더 심하면 공황장애라고 했다. 지인들은 그 나이에 겪는 통과의례이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거나 갱년기에 좋은 영양제나 식품을 알려주기도 한다. 나도 담담하고 의연하고 싶지만 처음 겪는 일이라 낯설고 당황스럽다.


 몸이 나를 압도하는 시간은 어쩔 수 없음을 배우는 시간이다. 이 어쩔 수 없음에서 취약함을 경험한다. 내가 질병 없고 장애 없는 건강한 몸의 소유자였다는 걸 갱년기 증후들로 깨닫는다. 장애를 지니고, 또는 관리해야 하는 질병을 가지고 산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생각해 본 적 없음’이 얼마나 큰 기득권인지 알게 되었다. 이년 전인가, 회원이던 의료조합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쾌적한 병원 입구를 들어서며 접수를 하려고 하니 거치대 위의 패드로 보이는 기기에 이름과 주민번호를 치라고 했다. 평소 쓰던 기종과 달라 자판의 한글배열이 익숙지 않아 이름 석 자와 주민번호를 누르는 것도 헤매게 되었다. 간호사는 천천히 하라고 했지만 찾아 간 환자에게 디지털 기기를 들이미는 그 병원엘 그 이후엔 가지 않는다. 공동체니 돌봄이니 하는 가치를 내세우지 않은 보통의 병원만도 못한 그 태도가 실망스러웠다. 만약 더 나이가 든 노인이라면 온통 낯선 디지털 세계 앞에서 얼마나 무력감을 느낄까 싶었다. 멀리 갈 거 없이 일흔여덟의 엄마와 여든셋의 아빠가 새로 들여 논 전자제품의 작동법 앞에 쩔쩔매고 매번 은행 창구에 가서 번호표를 뽑고 번거롭게 일을 보는 것이 떠올랐다. 세계는 젊고 건강한 몸, 젊은 속도에 맞춰 설정되어 있다는 걸 나이 들기 전엔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잘 관리된 외모의 노년 여성들을 내세워 만든 뷰티나 패션 광고를 심심치 않게 본다. 시니어라고 칭하는 노년들도 이젠 외모와 패션에 돈을 쓸 만큼 경제력이 있다는 시장의 판단 때문이겠지. 반짝이는 은발의 요가수련을 하는 60대 배우 문숙의 책도 여러 권 출간됐고 왕성하게 연기활동 중인 70대의 윤여정은 올해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다들 잘난 노년이다. 4,50대 여자 배우들의 사진 아래 ‘여전한 미모, 20대와 변함없어’ 같은 인터넷 포탈 기사는 컴퓨터를 열 때마다 지겹도록 본다. 중년인데 중년으론 보이지 않고 노년인데 노년 같지 않아서 멋지다고 한다. 멋짐과 아름다움도 젊은 외모에 고정시켜 놓는다. 

 젊은 동료가 나이 들어도 섹시한 할머니가 되어 여전히 연애를 할 거라고 했다. 늙어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도 젊은 여성들에게 자주 듣는다. 할머니가 될 날이 그들보다 가까운 나는 그 이야길 듣고 웃었지만 할머니가 된 자신을 떠올리면서 섹시와 귀여움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젊음의 상상력이 빈곤해 보였다. 가끔 젊은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이 드는 것, 늙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힘들고 사소하게 서운 것이 쌓여 문득문득 억울함이 올라온다고. 그래서 늙은 것만으로도 심사가 복잡한데 섹시하거나 귀엽기까지 해야 하냐고 그냥 늙자고 말이다.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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