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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는 여자 18화

나와 함께 여름을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을 나

by 조용한 언니

7월 중순부터 심리 상담을 다니고 있다. 심리 상담은 4년 전에도 3개월가량 받은 적이 있다. 일상이 불편할 정도의 심리적 어려움은 없었지만 당시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좀 상식적이지 않게 불쑥 불쑥 화가 올라왔다. 늘 사람의 심리와 내면에 관심이 많던 나는 한번쯤 심리 상담, 또는 자기 분석을 전문가와 해보고 싶었다. 심리 상담을 받을 만큼 힘들기보다 호기심이 더 컸다. 어떻게 오셨냐는 상담선생님에게 자주 화가 나서라고 하니 선생님은 화가 나는 건 긍정적인 신호라고, 이제부터 왜 화가 나는지 알아가 보자고 했다. 그 뒤 12주 동안 상담 가는 시간을 기다렸다. 내가 왜 화가 나는지 그걸 알아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나에게 집중하고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있어 기분 좋고 마음 든든했다.

4년 만에 다시 상담실을 찾아가는 날은 몹시 덥고 쾌청한 날이었다. 지하철역에 내려서 경의선 숲길 나무그늘 아래로 걸어가는데 매미소리가 파도소리처럼 와아 몰려왔다가 몰려갔다. 상담실은 같은 건물에서 한 평 넓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겨우 한 평일뿐인데 상담실은 더 쾌적하고 상담선생님은 4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여유 있어 보였다. 더 힘들어진 건 나뿐인 것 같았다. 두 차례의 상담을 하고 여러 종류의 심리 검사를 했다. 4년 전에도 했던 검사여서 일부는 생각나기도 했다. 그리고 한주 지나 검사결과를 들었다. 4년 전엔 억압된 분노를 가리키는 수치가 높았는데 이번 검사에선 우울, 불안, 분노 등 문제가 될 만한 심리적 이슈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그 억압 된 분노들이 올라와서 그동안 제 마음이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라고 하니 상담 선생님은 ‘맞아요, 그럴 수 있어요’라고 했다. 심리검사에 따르면 무의식의 나는 에너지가 크고 활달하며 튼튼한 자아를 지녔는데 의식의 나는 그 무의식의 에너지를 펼치지 못하고 좀 위축되어 있다고 했다. 사람을 믿고 사람이 중심인 나는 연대감과 동료를 원하고 동시에 일의 성취 역시 중요한 사람인데 성취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고 선생님이 말했다. 모르던 사실이 아니었는데 상담 선생님에게 다시 한 번 확인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올 봄 내내 끌탕이던 마음이 분노가 올라와서 힘든 거라면, 내 감정을 무의식에 밀어놓고 닫아둔 게 아니라서 힘들었다면, 적어도 내가 그 분노라는 감정에서 도망간 게 아니니 괜찮았다. 무의식의 내가 밝고 크고 건강하다는 것도 힘이 되었다. ‘자기 길을 누가 뭐라 하든 걷다보면 예순 살에 상도 탈지 누가 알아요.’ 라고 상담 선생님이 말해서 함께 크게 웃었다.

그날 상담을 마치고 기차를 타고 멀리서 온 친구를 만나러 갔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멀리서 벗이 찾아오니 기쁘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으니 군자답지 아니 한가’란 논어의 문장이 떠올랐다. 열혈 페미니스트 활동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하필이면 유교의 우두머리 공자의 말이 생각나서 얄궂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의 시간은 내내 즐겁고 유쾌했다. 사려 깊고 반듯한 친구는 오랜 전 자신이 활동하는 지역으로 나를 초대했었다. 일면식도 없던 나를 페미니스트 작가란 이름으로 초대했는데 나는 그만 그 ‘작가’라는 무게에 눌려서 내가 정말 작가인지 스스로에게 되물었고 근사한 작가는 아닌 것 같아 초대시간 내내 어쩔 줄 몰라 했다. 친구는 지역에서 활발하게 여성인권과 문화와 관련한 활동을 기획하고 강좌를 열고 있다. 단체를 만들고 공간을 열고 다양하게 활동의 방향을 모색하며 자기 길을 걷는다. 친구는 자신을 불만 불평분자라고 하지만 불만불평이 있다고 다 그렇게 소리 내어 말하고 싸우지 않는다. 멀리서 지켜보는 지지자인 나는 친구가 늘 멋져 보였다.

상담 선생님의 말처럼 사람이 중요한 나는 동료 하나 곁에 없는 내가 초라했다. 대단한 업적이 없어도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내겐 걱정거리나 걸림돌이 아니었는데 사람 하나 남기지 못해 초라하고 가난하다 여겼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니 동료를 내 성취로 여기니 초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다른 타인이 뜻을 같이 하고 마음을 나누며 한때 함께 하는 것이 그 자체로 귀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의 사람인 것이 중요한 나는 사람마저 내 업적으로 여겼나 하는 생각이 올라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만의 서울행에 나를 만나러 시간을 내어 준 친구가 있어서 그동안 사람에게 서운하던 마음이 그만 스르륵 녹아 버렸다. 친구 덕분에 그 친구의 지인도 만나 웃고 떠들면서 내내 즐거웠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오히려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 나를 드러내는 게 몇 회기의 심리치료보다 정신과 치료보다 유용하구나 싶기도 했다.


여성 간 연대, 여자끼리의 우애를 늘 그리워하면서 가까이 가면 실망하고 사람보다 일과 조직이 우선인 그들의 태도에 상처받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억울함이 쌓여 울분이 되고 분노가 되기도 한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름 내내 할 상담을 통해 구멍이 작은 채를 찾아서 마음과 감정의 앙금을 낱낱이 분별해내는 내가 될지, 이젠 그 분별이 큰 의미가 없을지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을 거 같은 기분이다. 연일 최고를 갱신하는 폭염의 여름동안 나는 나를 만나러 간다.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을 나를 만나고 싶다.

*2022년 9월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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