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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는 여자 19화

내 글쓰기의 기원

느긋하게 동화와 옛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by 조용한 언니

얼마 전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원고 하나를 마무리했다. 옛이야기를 페미니즘 관점으로 다시 쓰는 작업인데 작년 여름부터 편집자와 몇몇 동료와 함께 여러 차례 회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썼다. 편집자와 마케터의 몫이 아직 남았고 텀블벅 펀딩도 해야 하지만 내 역할은 다 끝났다. 저자 교정까지 마치고 나니 내가 새로 쓴 옛이야기를 언제 처음 읽었는지 새삼 기억을 헤아려 보았다.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부르는 국민학교 이학년 때 엄마는 거금을 들여 할부로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과 백과사전 그리고 위인전을 사주었다. 계몽사 전집은 주황색 하드커버의 두툼한 책으로 총 50권, 이단 책장을 함께 줬다. 전집의 첫 번째 책은 그리스 로마 신화였다. 질투하는 신들과 그 신에게 괴롭힘 당하는 인간들이 있었다. 각 나라 별 동화집도 있었다. 영국, 독일, 프랑스가 생각나고 일본 동화집도 있었고 십오 소년 표류기, 작은 아씨들, 톰 소여의 모험과 보물섬 같은 장편 동화도 함께 있었다. 옛이야기 책은 책장 아랫단 끝부분에 한국 전래동화집이라는 제목으로 있었다. 내가 새로 쓴 '연이와 버들 도령'도 그때 처음 읽었다. 혹부리 영감이나 은혜 갚은 까치보다 연이와 버들 도령을 나는 오래 기억했다. 엄마 없이 자란 아이 연이에게 아빠는 어느 날 계모를 데려다 놓고 멀리 장사를 떠났다. 계모가 등장하는 옛이야기가 늘 그렇듯 연이는 계모에게 갖은 구박을 받지만 착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한겨울 산 속 동굴에서 신비로운 버들 도령을 만나 친구가 되지만 계모는 버들 도령을 죽여 버린다. 콩쥐와 신데렐라의 계모는 연이의 계모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버들도령을 죽여 버리는 계모가 너무 무섭고 끔찍해서 그 경악과 공포심이 오래 남았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방 한 구석에 밀어놓은 동화전집을 방학이면 읽었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느긋하게 동화와 옛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평화롭고 행복했다. 십오 소년 표류기와 보물섬은 중학생이 되어서야 재미나게 읽었는데 남자아이들만 우르르 나와서 좀 서운했다. 어린이용 전집이라고 했지만 알퐁스 도데의 단편들도 있었고 조르주 상드의 소설도 있었다. 상드의 소설은 '사랑의 요정'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쌍둥이 형제에게 모두 사랑을 받는 여자 아이 이야기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랑받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가 죽고 괴팍한 할머니 밑에서 남동생과 함께 사는 가난한 여자 아이를 동네 사람들은 모두 싫어하고 배척했다. 마을과 멀리 떨어진 숲 입구 허름한 오두막에 사는 여자아이는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야성의 소녀였는데 동네 사람들은 여자아이와 할머니를 마녀라고 불렀다.


어린 나는 박해 받는 여자아이 이야기, 그럼에도 꿋꿋한 여자아이 이야기를 좋아했다. 한편으론 꿈을 이루는 고독하고 멋진 비혼 여성을 동경했다. 작은 아씨들의 조처럼, 제인 에어의 제인처럼 살고 싶었는데 씩씩한 조나 의지 강한 제인 모두 나이 많은 아저씨랑 결혼해서 어린 맘에도 영 못마땅했다. 옛이야기든 소설이든 이야기는 모두 좋았다. 하지만 위인전은 재미없었다. 다들 비범하고 특출 나서 나는 결코 그들처럼 될 거 같지 않았다. 나는 나처럼 보잘 것 없는 옛이야기의 여자 아이들이 좋았다. 가난한 집의 착하기만 한 여자아이, 그런데 나보다 용감해서 길을 떠나는 여자 아이, 동굴에 들어가 괴물을 만나고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를 풀고 돌아오는 여자 아이들. 아무리 무섭고 힘들어도 산새와 사슴이, 생쥐와 여우가 도와주니 길을 잃어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옛이야기의 여자 아이들은 모두 행복해졌다. 그래서 인어공주와 성냥팔이 소녀를 읽고서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인어공주는 바다의 물거품이 되고 성냥팔이 소녀는 새해 첫날 아침에 얼어 죽었으니까. 보고 싶은 할머니 곁에 갔으니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추운 겨울날 부모도 없고 친구도 없는 맨발의 가난한 여자아이가 가여워서 마음이 아팠다.


학교 공부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책을 좋아하는 나를 엄마와 아빠는 흐뭇해했다. 매일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다가 싫증이 나면 그림을 그렸다. 그 시절 동화책엔 삽화가 거의 없어서 나는 동화 속 주인공을 상상하며 그림을 그리곤 했다. 아빠는 그림도 잘 그리고 이야기도 잘 만드는 만화가는 참 훌륭한 예술가라고 하면서 내가 예술가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만화가 고우영을 좋아하던 아빠는 내게 만화가 많이 있는 어깨동무나 소년중앙을 사다주어 엄마에게 지청구를 들었다. 내 세대 부모들은 학교 가서 공부하는 것이 평생소원인 이들이 많아서인지 아이가 책을 보면 무조건 격려해줬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건 없는 살림에 동화전집을 들여 놓고 용돈으로 소설책을 사보던 나를 내버려 둔 내 부모덕이다. 비록 훌륭한 만화가는 되지 못했지만 지금도 나는 쓰고 그리고 있으니 말이다.

월간 작은책 2022년 10월호

*페미니즘으로 다시 쓰는 공주 이야기 / 이프 북스 2022년 10월 출간

작년 가을께, 이 글을 쓸 무렵 나온 책, 나로서는 7,8년 페미니즘 세례를 흠뻑 받으며 페미니즘 공부를 하고 난 후의 일종의 결과물 같은 책이다. 책을 쓰기 전 페미니즘으로 얽혔던 모든 관계들이 씁쓸함만 남기고 끝나버렸는데 이 책으로 살풀이를 한 느낌. 다시 쓴 옛이야기보다 작가 해제랄 수있는 에세이가 더 쓰기 어려웠고, 게다가 너무 허술하게 쓰여져서 아쉬움도 남지만 그건 앞으로 내가 경험하고 공부하면서 풀어나갈 문제라는 생각.

나 외에 두 명의 처음 책을 내보는 30대 여성과 60대 여성이 함께 출간했는데 나이가 각기 다른,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이 한 책의 저자라는 것도 요즘같이 나누고 분리하는 -페미니즘 진영에서마저 다들 서로 선긋고 결별하기 일쑤 인 시절이니까.- 시절엔 미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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