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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는 여자 21화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스스로 힘이 되는 여자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고, 분노를 나누지만 경쾌하고 즐거운

by 조용한 언니

오래전 책읽기 모임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젊고 아름다운 매력적인 여자였다. 이런저런 속내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나를 언니라고 부른 여자는 무엇보다 선량하고 다정했다. 종종 만나 읽은 책들을 이야기하고 밥을 먹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와 다른 점이라면 한창 젊은 그녀는 늘 연애 중이었고 그러다가 결혼을 했다. 젊은 여성이고 비혼을 고집하지도 않았으니 그러려니 했다. 결혼식엔 가지 못했다. 대신 결혼 선물을 주려고 했는데 서로 날짜를 맞추다가 연락이 뜸해졌고 선물도 주지 못한 채로 소식이 끊겼다. 귀농했다는 말을 우연히 들었는데 잘 살겠거니 하며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서울에 있다고 했다. 만날 약속을 잡다가 혹시 아이가 있는지 물었는데 웃으면서 이젠 혼자라고 했다. 보지 않는 시간동안 그녀에게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싶었다. 내가 아는 그녀는 지적이고 재능이 많았지만 신기할 정도로 자기성취욕이나 욕심이 없었다. 그땐 그저 그게 그녀의 기질이나 성격인줄 알았다. 어린 시절 그녀에게 일어난 성폭력을 듣기 전까지 말이다. 친오빠에 의해 벌어진 성폭력은 내가 그녀의 성격으로 오해했던 욕심 없음이 사실은 무기력이고 성취욕 없는 듯 보였던 그녀의 태도들은 우울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안전해야 할 집에서 벌어진 성폭력, 자신에게 벌어진 그 폭력을 가장 가까워야 할 엄마에게도 말하지 못한 어린 그녀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팠다.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내내 외로웠을 그녀의 시간이 가여워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기억을 마주하고 나오고자 애쓰는 그녀가 용감해서 눈물이 났다. 어린 시절 강력한 폭력의 트라우마인 사건을 당사자인 그녀는 침착하게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그녀는 시간이 지나 그때 내가 같이 울어줘서 고마웠다고, 그 일에 처음으로 울어 준 사람이라고 했다. 자기 고통을 공감 받아서 이젠 말해도 될 거 같아서 힘이 됐다고도 했다. 같이 우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구나. 눈물이 힘이 되다니, 어렵지도 않은 이걸 세상은 왜 못해주나 싶었다. 그리고 내가 힘이 된다는 말은 내게도 위로가 되었다.



그 뒤로도 우리는 예전처럼 종종 만나서 밥을 먹고 수다를 떨었다. 다시 비혼으로 돌아온 그녀와 늘 비혼인 나는 이젠 비슷한 것이 많아졌다. 그녀는 어린 시절 자신을 돌보지 않던, 여전히 가해자 오빠 편인 늙은 엄마의 암투병을 돌보는 중이다. 함께 살진 않지만 지방에 사는 엄마는 서울의 병원으로 항암 치료를 받으러 올 땐 그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늙은 부모와 함께 사는 비혼의 프리랜서인 나와 할 이야기가 더 많아졌다. 우리는 혼자 사는, 혹은 결혼하지 않은 딸들이 담당해야 하는 늙은 부모의 돌봄에 대해 그 정서와 감정의 소진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정서와 감정 돌봄이 여성의 몫인 양 당연시하는 사회에 대해서 분개하기도 한다. 우리의 대화는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고 분노를 나누지만 경쾌하고 즐겁다. 내게 오빠 성폭력을 말한 이후 그녀는 여성주의 상담을 오랜 시간 받았고 성폭력의 기억과 그 후 고통을 통과한 삶과 일상을 글로 썼다. 치유의 과정이기도 한 그녀의 글쓰기를 나는 격려했는데 그녀는 내게 마무리된 자신의 글을 봐달라고 했다.


만 열 네 살의 어느 여름밤부터 지금 현재의 그녀까지 진솔하고 담백하게 쓰여 진 그녀의 치유기록은 그녀와 같은 폭력과 고통을 겪는 여성들에게 그리고 자기를 알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관계에 상처받고 세상의 통념에 자주 위축되는 많은 여성들에게 괜찮다고 우리는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위로하고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고통 속에 있던 피해자, 약자에게 위로를 받다니 말이다. ‘글쓰기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복수’라고 그녀는 쓰고 있는데 그 우아한 복수는 그저 복수에 그치지 않고 다른 여성에게 위로와 연대의 손을 내민다. 그야말로 우아한데 올바르기까지 한 복수이다. 피해자 여성의 사적인 개인적인 글쓰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심하는 이가 있다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즘의 오래 된 경구를 들려주고 싶다.


정서적 돌봄이 전혀 없는 팍팍한 가정, 생계를 책임지는 가난에 지친 양육자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던 아이에게 벌어진 오빠 성폭력, 그 이후 한 여자의 현실과 내면의 고군분투가 치열한 정치가 아니면 무엇이 정치인가. 자기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말하고 글을 쓰는 것은 얼마만큼 큰 용기인가. 그래서 가부장제가 말하는 진정한 피해자, 완벽한 피해자가 아닌 피해자는 어느덧 자기 삶을 포용하고 가해자 따위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계속 상처받는 딸보다 더럽고 치사한 딸이 낫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얼마 전 그녀의 글은 책이 되었다. 심이경이란 필명으로 <나는 안전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내가 아는 가장 지적인 사람 중 하나인 그녀는 자신의 지성을 잘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지성이 ‘상처 입었지만 섬세한 가슴’에서 나온다는 것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다음에 만나면 너의 상처 입은 가슴 덕분에 너의 지성이 빛난다고 말해주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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