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불편한 것들로 똘똘 뭉쳐있다
”선생님, 저는 왜 이렇게 불편하다고 느끼는 게 많을까요? 제가 성격이 예민해서 그런 거겠죠?“
심리상담 선생님께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뜻밖의 대답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던 그때가 새삼 기억난다.
“인생은 원래 불편한 것들 투성이에요.”
인생의 디폴트값이 행복함이나 편안함이 아닌 불편함이라니. 그야말로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말로 맞는 말인 것 같다. 당장 지금 이 순간만 보더라도 주변에는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 투성이다. 종류로 따지자면야 감각기관을 불쾌하게 자극하는 일차원적인 불편감도 있고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으로 인한 불편감,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에서 오는 본능적인 불편감 등등 떠들어보라 하면 밤새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많다. 그리고 사람마다 불편감 레이더망에 걸리는 무언가가 다르다. 그래서 나의 마음을 아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상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자그마한 오해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경우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나 말하는 어투에서 불편감을 잘 느끼는 편이다.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게 가장 치졸한 공격이라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창피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만큼 말이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받아들이고 살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살면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드디어 친밀하게 생각하게 된 이들에게서도 종종 묘한 불편감을 느끼곤 했으니 말이다. 그럴 때면 이토록 가까웠던 우리가 이렇게나 먼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다니, 하고 나 혼자 몰래 거리감을 가지곤 했다. 내가 불편해한다고 상대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다. 단지 상대가 의도한 바와 다른 형태로 나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
대표적으로 내가 불편감을 크게 느끼는 말에 “정답”이라는 단어가 있다. 흔히들 “이게 정답일지 모르겠지만“ 혹은 ”이게 정답이라 생각해서“와 같은 문장을 구사하는데 나는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귀에 까슬까슬하게 걸려서 다음 말들이 들리지 않곤 한다. 정답이라는 단어가 불편한 이유는 이 말을 내뱉는 순간 그 반대의 개념인 오답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슬그머니 존재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럼 맞고 틀리고를 따질 수 있는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애당초 누군가의 선택이나 생각이 맞고 틀릴 수 있는 영역의 것인가? 그저 다르다고 표현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수학문제나 자격증 시험과 같이 명제가 명확하거나 맞고 틀리고를 따질 수 있는 공신력 있는 주체가 있다면 모를까. 애초에 이렇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인간인지라 정답이라는 단어를 듣거나 틀리다는 말을 들으면 어쩔 수 없이 발작 버튼이 눌리고야 만다.
또 최근에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부류 중 대중교통 빌런들이 있었다. 한두 번 겪은 일은 아니지만 새삼 기억에 남는다. 비가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날 버스 정류장에 할머니 세 분이 비를 피해 앉아계시길래 나도 버스를 기다리며 그 앞에 서있었다. 그러다가 버스가 오자마자 나를 밀치면서 서로 버스에 먼저 올라타려고 용쓰시는 걸 보면서 비에 젖은 옷처럼 마음이 축 쳐지고 말았다. 밀치지 않으셔도, 먼저 타려고 용쓰지 않으셔도 자리를 내어드릴 텐데. 뒤에 앉아 계셔서 말씀하시기 어려웠나? 어떨 땐 나를 밀치고 아무 사과도 없이 앞으로 뛰쳐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습관처럼 집에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가 있나 보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도 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집에 임산부가 있다고 셈을 한다면 아직도 우리나라 출산율이 이렇게 낮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런 상황을 이렇게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너무 심하게 착하시네요. 저였으면 가서 똑같이 밀쳐줬을 텐데. 그리고 말 안 하면 손해예요. 밀치지 말라던가 사과하라고 말해야죠.”
정확하게 이 말이 맞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비슷한 뉘앙스의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말을 들으면서도 여러 대목에서 불편감을 느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지금은 그저 웃음이 난다. 내 불편감 그물에 우르르 걸려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때 느꼈던 불편감은 차치하고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불편감으로 똘똘 뭉쳐 있냐는 거다. 마치 퀘스트를 깨듯 하나하나씩 헤쳐 나가야만 진득한 인생교훈이라도 얻을 수 있는 걸까?
내가 가장 헤쳐 나가기 버거운 불편감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불편감이다. 나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누군가가 함께 잡고 있는 관계의 끈을 느슨하게 풀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불편감 레어더가 경고음을 울린다. 계속해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친밀하게 지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오는 이 안달감, 초조함, 불안감. 나아가서는 나를 떠나버릴까 봐 두려울 때도 있다. 이와 달리 반대의 경우도 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누군가가 갑자기 관계의 끈을 훽 잡아채 팽팽하게 만들어버리면 또 한 번 불편감 레이더가 경고음을 울린다. 더 가까워지기에는 부담스러운데, 그만 와주면 좋겠다, 하는 마음과 함께 말이다. 말과 관계의 영역에서 이래도 불편하고 저래도 불편한 나는 드디어 스스로를 걸어 다니는 불편감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불편감을 자주, 크게 느끼는 내가 어떻게 이 불편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끌어안을 수 있을까?
심리상담 선생님께서 좋은 해답을 제시해 주셨다. 너무나도 심플해서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다 허튼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된다. 그 해답은 바로, 인생은 원래 불편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편감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견뎌내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 정도 말하는 게 심리상담가의 일이라면 나도 심리상담할 수 있겠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저 솔루션을 그저 흘러가는 말 한마디쯤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때 정신이 멍해졌다. 내가 불편감을 견딘 적이 있기는 할까? 불편감을 느끼면 바로바로 표현해 버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 여간 당황스럽지 않은 제의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뒤로 몇 개월이 흐른 지금 신기하게도 불편감을 끌어안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인정하고 견뎌본다는 게 이런 게 맞는 건지 아직 확신이 서지는 않지만 적어도 불편감을 느끼는 순간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어떻게 대응할지 침착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인생은 원래 불편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