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고민을 나눠 들어주는 위로
때는 스물두 살이었나, 스물세 살이었나, 정확한 시기는 가물가물하지만 이십 대 초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이좋았던 부모님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어졌고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갈 때면 현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아뿔싸 밖에서 더 놀고 올걸,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집에서는 사람의 온기랄게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두 살 어린 동생과 아빠와 함께 살고 있었고 아빠는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망고를 어떻게 까서 먹어야 하는지도 몰랐던 살림풋내기였다. 살림을 모르더라도 그냥 까보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손에 물 한번 묻히지 않고 살았던 걸 굳이 굳이 티 내는 아빠가 참으로 답답했다. 그런 아빠가 총책임자였던 그때의 집은 별로 살고 싶은 축에 끼지 못했던 것이다. 기꺼이 같이 해냈어야 하는 게 집안일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아빠와 정서적 거리 두기를 하고 있던 터라 우리 집에서는 사람끼리 오가는 대화도 거의 없었다. 다들 각자의 방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컴퓨터를 하는 등 그냥저냥 시간을 흘려보냈으니 말이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그 후로 몇 개월이 지나서였다. 마땅한 돈벌이가 없었던 나는 내 기준에서 봤을 때 아직도 부모님한테 용돈을 타서 쓰는 애송이였고 모아둔 돈도 충분치 않으니 섣불리 독립을 선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아빠가 경영하고 있는 회사가 썩 잘 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성인이 된 후라 딱히 손발이 묶인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그때 왜 그렇게 소극적이고 방어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사소한 것에 쉽게 불안해지고 곧잘 무력해졌다. 고백하자면 이 무정한 세상을 탓하며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 같다고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마음에 무게를 잴 수 있다면 그때의 내 마음은 내 몸뚱이에서 체지방을 뺀 나머지를 차지할 정도로 묵직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마디로 나라는 사람은 체지방 덩어리와 마음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듯했다. 대책은 없고 계획도 모르겠으니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아, 잊지 말자, 체지방도 무거운 축에 속했다. 아무튼 그런 탓에 매일 집에 늦게 들어가려고 발버둥 치며 저녁 약속을 달고 살았다. 어떻게든 죽기 살기로 밤 12시를 넘기려고 잘 안 넘어가는 소주도 목구멍 뒤로 쿨하게 넘기는 척했던 것 같다. 그러니 취할 수밖에.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지하철 막차가 끊긴 시간이었다. 술이 제법 취해서 입을 오물오물거리며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말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중이었다. 혼잣말까지 중얼중얼. 다행히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게 택시에 올라탔다.
“어서 오세요. 어? 어..? 어????“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아빠와 비슷한 연배의 택시 기사님이 건네는 인사, 그 자상한 목소리를 듣고 나는 그대로 무너져버렸다. 눈물 커뮤니케이터답게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흘린 게 아니라 거의 물총처럼 앞으로 쏘는 정도였다. 눈물은 곧 대성통곡으로까지 이어졌다. 기사님은 백미러로 나를 몇 번 살피시더니 말없이 출발하셨다.
그렇게 몇 분을 달렸나, 내가 흐느끼는 정도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기사님이 내게 천연덕스럽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어느 집 공주님이 이렇게 우시나.”
그 너스레 덕분에 폭포 같은 눈물을 비집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공주라니. 다소 품위는 없지만 공주라 하시니 용기 내어 한마디 말을 붙여봤다.
“흑흑.. 저희 엄마 아빠가 이혼하실 것 같아요. 너무 슬퍼요 기사님.”
“실컷 우세요. 괜찮으니까.”
기사님은 살갑게 말씀하시며 한강대교를 쌩쌩 달렸다. 나는 눈물을 닦는 대신 찬바람에 눈물을 말리려고 창문을 내렸다. 창문 밖으로는 곤색 물감을 칠해놓은 듯한 하늘 아래로 하얀 LED 빛이 점박이처럼 박혀있는 높은 건물들이 불규칙하게 서있었다. 그중에는 63 빌딩도 있었고 오피스 건물도 있었고 아파트도 있었다. 또 흐느끼기 시작했다. 저렇게 많은 집 중에 왜 내가 맘 편히 살 수 있는 집은 하나도 없는 거야, 엄마 아빠는 왜 저러는 거야, 으앙. 눈물이 마르기는커녕 오히려 창문 밖으로 방울방울 맺히다가 흩뿌려지고, 또 맺히다가 흩뿌려지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나는 30분 동안 택시를 타고 집으로 달려왔다.
“여기서 세워주시면 돼요. 흑흑..”
기사님은 기어를 파킹으로 두고 갑자기 얼굴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울고 싶으면 좀 더 울고 가도 돼요.”
기사님은 돌연 미터기를 멈추었다. 그때였을까, 나를 억누르던 돈돈돈 그리고 더러운 세상!이라고 외치던 인생살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일순간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대신 어디에 숨어있었던 건지 모를 눈물이 또 왕창 흘러나왔다. 기사님은 그렇게 10분 동안 나의 대성통곡과 신세한탄을 말없이 들어주셨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날 그 택시 기사님께 받았던 위로의 온도를 잊지 못한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내게 그 정도의 위로를 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기사님의 태도였다. 사실 어찌 보면 술 먹고 떼쓰며 우는 대학생처럼 보였을 텐데 승차거부를 할 수도 있었고 얼른 내리라고 타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님은 내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주고 맞받아쳐주고 나를 마치 공주처럼 귀하게 대접해 주셨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귀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은 아직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다.
그저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던 그날의 나는 그 귀한 택시 기사님을 만난 이후 어쩐지 조금 달라졌다. 세상은 아직 따뜻한 거 같아, 하면서. 그래서 나도 종종 무거운 고민을 가진 이를 마주칠 때면 그때 느꼈던 위로의 온도를 나누려고 한다. 뜻대로 잘 안 되는 듯싶지만. 그럼에도 내가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고민을 기꺼이 나눠들겠다고 하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세상은 그렇게 조금 더 살만한 곳이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