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의 낭만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나만의 시간 만들기

by 건빵진소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내 최애 영화를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리틀 포레스트>라고 답했다. 그것도 한국판. 나는 마음이 심란할 때면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리틀 포레스트> 영화를 틀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의 나는 의외로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을 질투했던 것 같다. 그녀는 내가 가지지 못한 면모를 참 많이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가장 부러웠던 점을 꼽으라면 그녀가 혼자서 시간을 너무나도 잘 보낸다는 사실이었다. 화면에 비친 그녀는 그녀의 세상에서 혼자 두 발로 온전히 설 수 있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외롭지만 부지런히도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문득 영화가 켜져 있는 노트북 화면 위의 내 얼굴로 시선이 갔다. 내 얼굴이 그녀의 얼굴에 겹쳐 보였다. 비참함이 몰려왔다. 나는 왜 아직도 그녀처럼 혼자 힘으로 설 수 없는 사람일까. 왠지 자꾸만 그녀가 부러워져서 언젠가 그녀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영화를 보고 또 봤다. 그렇게 똑같은 영화를 스무 번은 넘게 본 것 같다.

현실에서의 나는 근근이 회사생활을 버티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어쩌다 퇴사와 이직을 준비하며 한 달간의 공백이 내 손에 쥐어졌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리틀 포레스트>가 떠올랐다. 다짜고짜 제주살이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정보를 나누는 카페에 가입했다. 가입한 지 얼마 안 된 새싹회원으로서 볼 수 있는 정보도 별로 없었는데 어찌어찌 보름 살기가 가능한 독채 하나를 발견해 바로 예약을 해버렸다. 이왕 한 달 정도 쉴 수 있으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리틀 포레스트> 감성에 폭싹 젖어봐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제주를 찾은 것이었다.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던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예약한 렌터카부터 찾은 나는 마치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처럼 매우 들떴다. 네가 보름동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어쩌면 무자비할지도 모르는 나의 대이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줄 차구나, 하고 미리 대견하다는 눈빛을 건넸다. 자, 그럼 이제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를 시작해 볼까나.

나는 제주공항에서 약 1시간 정도 달려 서귀포시로 넘어갔다. 예약한 숙소는 제주도 지도를 기준으로 남서쪽에 있는 모슬포항 인근에 있었다. 제주바다 근처에 있는 독채라니, 숙소 안에서도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주인아줌마를 뵙고 내가 묵을 방을 확인했다. 주인집 바로 옆에 위치한 독채였는데 안에는 나름 요리를 할 수 있는 작은 부엌도 갖춰져 있고 아늑하니 이보다 좋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 주인아줌마가 방을 소개하고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신 후 나가시자마자 나는 입을 틀어막고 연신 이상한 소리를 내며 기뻐했던 것 같다. 드디어 그토록 고대하던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 시간이 시작되었으니 기쁠 수밖에. 하지만 그날은 시간이 늦었던 터라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잠이나 일찍 자고 내일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하고 침대에 누웠다.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보름동안 하루를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책도 읽고 커피도 내려 마셔야지, 저녁에는 근처에 혼술 할 수 있는 곳에 가서 근사하게 한 잔 해봐야겠다,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행복한 계획에 나는 첫날 잠을 설치고 말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영화에서처럼 상쾌하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날 줄 알았는데 어쩐지 뭔가 이상하고 오묘했다. 집에는 예상치 못한 적막이 흘렀다. 혼자 있다 보니 말할 상대도 없었거니와 숙소는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그때 조금 당황했던 것 같다. 영화에서는 이럴 때 어떻게 하더라, 하고 계속 기억을 끄집어내려 했다. 그러다가 이 적막과 외로움에 조금 익숙해지고 나서는 내가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갑자기 물음표가 생겼다. 사실 백수인 상태이니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을 텐데. 그럼에도 마음이 캥겨서인지 평소에 안 하던 이불 정리부터 했다. 그러고 나니 커피를 너무 마시고 싶은데, 중얼거리며 주변 카페를 검색했다. 주변에 카페가 많지도 않았고 있더라도 몇 시간 후에 오픈하는 곳들뿐이었다. 시간을 때울 겸 평소에 안 하는 독서를 했다. 졸려 죽겠는데 아침에 너무나도 근사하게 독서라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하지만 참을성이 좋지 못한 나는 낭만이 문을 열고 현관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핸드폰을 봐버렸다. 며칠 전까지 밤낮없이 치열하게 일하는 사람이었던 게 무색할 만큼 나는 지나치게 한가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서 마음껏 뒹굴 거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문득 며칠 전에 나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던 업무 이슈가 지금은 잘 해결되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회사 선배한테 연락해 볼까, 고민하던 찰나에 어떤 부분에서 이상함을 감지했다. 정말 이상했다. 내가 퇴사했는데 아직까지 회사가 망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다니! 그때였나, 제주에 오기 전까지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던 현실의 잡다구리 한 문제들이 왠지 하찮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있던 현실이 작디작은 스노볼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작은 스노볼 안에서는 반짝이가 흐드러지고 눈송이가 흩날리는 낭만적인 크리스마스 같은 광경이 아니라 커리어, 미래, 돈, 연애, 가족 문제라는 시커먼 먼지들이 소용돌이치며 나를 덮치는 절망적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멀리 떨어져서 보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역설적이게도 평온함을 느꼈다. 현실에서의 고민들이 별 것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제주에 있는 이 순간이 소설이나 꿈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고요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리틀 포레스트>의 감성을 느끼려고 혈안이었던 나는 그렇게 무료하고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자명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평소에 안 하던 짓들을 참 많이도 했다. 편도로 3시간을 달려 낯선 마을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에 갔고 구석구석 숨겨진 카페나 소품샵을 찾아다녔다. 최단경로를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의 말을 듣지 않고 일부러 멀리멀리 돌아서 갔고 그러면서 하마터면 못 볼 뻔했던 멋들어진 풍경들을 눈에 잔뜩 담았다. 재빠른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느릿느릿한 드립커피를 주문했고 커피를 기다리며 카페 안에 떠 다니는 그윽한 커피 향을 코에 잔뜩 묻혀왔다.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그건 바로 수제 막걸리 만들기였다. <리틀 포레스트> 영화에는 주인공이 집에서 직접 빚은 막걸리를 친구들과 나눠 마시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처음 본 이후로 나는 영화 속 막걸리의 뽀얗고 달달한 낭만, 그것을 향한 요상한 집념이 생겼더랬다. 사실 사서 먹는 게 바로 먹을 수 있고 싸고 품도 안 들고 맛도 있는데 말이다. 아무튼 일단 주변 시장이나 오일장부터 탐색하기로 했다. 막걸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쌀과 누룩이 필요한데 내가 있던 장소가 택배비도 더 받는다고 하는 제주이기도 하고 보름 살기로 인한 시간 제약 때문에 도저히 인터넷으로 주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장에는 있지 않을까, 하고 샅샅이 뒤졌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발견해 버렸다. 눙글납작하고 못생긴 누룩을. 누룩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지금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기쁜 마음과 함께 숙소로 돌아와 블로그의 막걸리 레시피를 보며 본격적으로 막걸리 만들기를 시작했다. 손이 퉁퉁 부을 정도로 쌀을 물에 씻어댔고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찌어찌 우왕좌왕하며 하루 꼬박 걸려 막걸리 비스무리한 걸 만들어냈다. 이른 오후에 시작한 것 같은데 다 완성하고 보니 밖이 깜깜했다.

그렇게 우당탕탕 만든 막걸리를 이제 막 발견한 엄청난 보물처럼 하루에도 몇십 번씩 들여다보고 쓰다듬으면서 며칠 동안 발효를 시켰다. 뭐든지 빨리빨리를 추구하는 내가 태어나서 오래간만에 견뎌낸 인고의 시간이었다. 물론 그 시간 동안 나의 마음처럼 달콤하게 익어가는 막걸리의 향을 맡은 개미들이 숙소에 들끓어서 한바탕 난리가 나기도 했지만. 보글보글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막걸리가 발효되는 소리가 아니라 개미떼가 습격하는 소리였던 걸 깨닫고 매일 밤 경계태세를 하느라 잠을 못 잤던 기억이 난다. 막걸리가 얼추 그럴듯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 때 나는 제주에 사는 친구를 숙소로 초대해 시음회를 했다. 친구는 이 귀한 걸 진짜 먹어도 되냐고 거듭 물었고 나는 맛있게나 먹어달라고 졸랐다.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짠을 한 후 원샷을 때렸다. 어, 뭔가 이상하네, 둘 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먹자마자 고약한 방귀가 뿌웅하고 나올 것만 같은 걸쭉하고 시큼한 맛이었다. 만들 때 재료의 비율이 잘못된 건지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온도를 잘못 맞춘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방귀 조심하자고 서로에게 당부하며 왁자지껄하게 막걸리를 걸쳐댔다.

돌이켜보면 제주에서의 보름동안 나는 평소에 안 하던 짓들을 참 많이도 했다. 경주마라는 평소의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무조건 빠른 걸 추구하는 내가 머리가 다쳤나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대체로 빠름보다는 느림에, 효율보다는 비효율에, 편안함보다는 불편함에 가까운 순간들로 가득했다. 그런 순간들이 오면 나는 왠지 그 순간 어딘가에 보물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느리고 비효율적이고 불편한 순간이 주는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들이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지녔는지 말로 형용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순간들을 마주할 때면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살아있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마음에 잔상을 오래 남기는 법이다. 그래서인지 제주에서의 보름은 내가 육지로 돌아왔을 때 다시 평소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내게 만들었다. 시커먼 먼지 같은 고민들이 나를 덮쳐와도 예전보다 덤덤한 마음으로 고민들을 털어냈다. 어쩌면 그 시간들은 내가 앞으로의 일상을 살아내며 숨이 가빠오고 힘에 부친다고 생각이 들 때 언제든 꺼내보고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나만의 든든한 <리틀 포레스트>가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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