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창과 팟타이와 곰장어

무력했던 나를 구원해 준 선배와의 식사

by 건빵진소라

불과 서너 해 전이었다. 나는 회사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나라는 인간이 어떤 쓸모를 가지고 태어난 걸까, 아니 애초에 쓸모라는 것이 내 안에 있다는 게 가당키나 한건가, 라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던 때가 있었다. 새로운 직업과 직장, 그리고 동료들은 내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역할을 요구했다. 경험치가 없는 일을 맡다 보니 나는 나름 사회생활 7년 차임에도 거의 신입 같은 상태였다.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고 물어볼 사람도 마땅치 않았다. 지금껏 일을 보란 듯이 멋지게 해내며 쓸모를 당당하게 증명해 왔다고 자부하던 나에게 그야말로 암흑기 같은 시기였다. 나는 무언가를 되돌릴 수도 그렇다고 크게 바꿀 수도 없는 현실 앞에서 때때로 무력했고 때로는 설 자리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그러는 사이 점점 말라비틀어져가는 나의 꼴이 그냥 보기에도 너무나 처참해 웃는 가면을 씌우고 교묘하게 나의 상태를 숨기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날 예전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강이 훤히 보이는 멋진 사무실에 있을 때였다. 나는 시원시원한 한강뷰보다는 선배의 밥 먹자는 소박한 메시지 한통을 보고 그제야 숨통이 조금 트였다. 우리는 저녁 시간에 맞춰 혜화역 곱창집에서 만났다. 지글지글 곱창 익는 소리가 듣기만 해도 고소했다. 노릇노릇한 곱창을 앞에 두고 따끈한 근황 이야기를 나눴다. 선배는 이전 직장에서 퇴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얼굴에서 후회된다거나 아쉽다거나 하는 감정은 몇 번이나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개운해 보이기만 했다. 그는 말간 얼굴로 나에게 회사생활이 어떤지 물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서 그간 느꼈던 고단함을 쏟아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느라 잊고 있던 곱창의 존재를 깨달았다. 어서 먹자, 선배가 말했다. 우리는 여느 집에서 파는 것보다 곱이 빵빵한 곱창을 질겅질겅 씹으며 회사 이야기도 함께 씹어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동안 가슴에 콱 걸려서 꿈쩍도 안 할 것 같았던 회사 이야기가 곱창과 함께 내 속으로 잘도 씻겨 내려갔다. 나의 안녕을 누구보다 진심으로 염원하고 있는 선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어서인 것 같았다. 게다가 선배는 내 이야기를 그냥 듣고 있지만은 않았다. 내 상황에서 어떻게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주기 시작했다. 나에게서 가능성을 찾아주는 선배가 곁에 있으니 괜스레 내가 아직은 쓸만한 인간인가 싶었다. 우리는 곱창이 지글지글거리던 불판 위에 야무지게 볶음밥까지 볶아먹었다. 그 밤 나는 오랜만에 마음의 허기가 달래지는 기분을 느꼈다.

며칠 후 선배에게서 또 연락이 왔다. 점심을 먹자는 연락이었다. 웬일로 또 연락을 하셨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바로 약속을 잡았다. 내가 있던 회사 근처 태국음식점에 갔다. 선배와 나는 팟타이를 시켰다. 아삭거리는 숙주가 면과 잘 어우러지도록 열심히 비비면서 내가 물었다.

"선배 무슨 일 있으세요? 웬일로 또 보자고 하셨어요?"

"내가 너한테 제안을 하나 하려 해."

선배의 입에서 제안이라는 단어가 나오다니, 너무나도 뜬금없는 말이 나온 까닭에 내 손에 쥐어졌던 젓가락이 살짝 미끄러졌다. 그 탓에 팟타이 소스가 접시 밖으로 조금 튀어나갔던 것 같다. 맹한 표정으로 소스를 닦는 나를 보며 선배는 사뭇 비장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다시 대행사에 가게 되었어, 팀장으로. 내가 팀을 만들건데 그 팀에 너를 꼭 데려가야겠어."

이런 전개인 줄 알았다면 맛있는 술까지 사달라고 하거나 좀 더 비싼 집을 갔어야 했는데 아쉽군, 속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사실 하늘을 나는 것 같이 기뻤다.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가 나에게 같이 일을 하자고 하다니! 게다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니! 나의 쓸모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현실을 생각해 보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나에게 광고대행사로 다시 돌아간다는 건 다시는 광고주, 즉 브랜드로 올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과 별개로 나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선배도 이해한다며 편히 생각해 보고 알려달라고 했다. 선배의 말대로 나는 마음을 편히 먹고 팟타이 파티를 즐겼다.

팟타이만 얻어먹고 튈 생각은 아니었지만 며칠 후 나는 본의 아니게 선배가 아쉬워할 소식을 들고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지금 있는 회사가 나에게 너무 힘들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행사에 가기 어려울 것 같다, 선배가 함께 다시 일하자고 제안해 준 건 너무 감사하고 영광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이렇게 답변을 드리게 되어 너무나도 죄송한 마음이다, 라고 말했던 것 같다. 사실 말을 떨 정도로 긴장했던 탓에 어떤 말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선배는 긴 말 하지 않고 일단 알겠다고 짧고 명료하게 말했다. 그런데 잠깐, 일단이라고?

예상대로 며칠 후 선배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이번엔 저녁을 사주겠다고 하셨다. 지난번의 과오가 떠올라 나는 호기롭게 내 돈 주고는 못 먹을 것 같은 곰장어를 골랐다. 선배는 놀랍지 않게 바로 오케이를 했다. 선배와 나는 삼각지역 인근에 위치한 허름한 곰장어집에서 만났다. 시간이 늦지 않았는데도 밖이 어둑어둑했다. 그 사이 노릇노릇 잘도 구워진 곰장어가 내 입안에서 불향을 뿜어내며 방울토마토 터지듯 터졌다. 행여나 아까운 육즙이 새어나갈까 봐 나는 입을 꾹 닫고 목구멍으로 넘겼다. 선배는 잘 먹는 나를 보며 팟타이 집에서보다 더 간절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다시 한번 제안할게. 나랑 같이 일하자."

비싼 곰장어를 사준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차렸기 때문에 놀랄 것도 없었는데 나는 새삼 크게 놀랐던 것 같다. 사실 선배는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다. 선배는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가볍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사람도 아니다. 선배는 말을 뱉으면 꼭 지키는 사람이었고 그런 만큼 쉽게 말을 뱉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또 똑같은 제안을 하다니. 곰장어집에 오기 전까지 사무실에서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 인간인가 하는 생각으로 고통스러워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 때문인지 선배가 자꾸 따라주는 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나는 나의 쓸모를 나보다 더 잘 알고 믿어주는 사람을 한번 믿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럼 면접이라도 봐볼게요."

면접만 봐보겠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연봉협상까지 끝냈다. 그렇게 나는 선배가 팀장인 팀에 합류하여 파트장 타이틀이 달린 명함을 가지게 되었다. 서로 떨어져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다행스럽게 나와 선배는 예전처럼 합이 잘 맞았고 곱창, 팟타이, 그리고 곰장어와 함께 했던 선배와의 식사자리들은 우리에게 정겨운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가 너무나도 작아져서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 시기를 겪는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빛나는 사람인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곤 한다. 어쩔 땐 애초에 빛났던 적이 있었나 스스로를 두고 의심하게 되기도 한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나를 알아봐 주는 선배를 그 시기에 딱 만났다. 돋보기를 들고 나를 들여다보면서 여기 아직도 빛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던 선배. 선배는 내가 필요할 때 딱 나타나서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오만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작아지는 시기가 닥쳐오려고 해도 이제는 조금 덜 무섭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를 못 믿더라도 나를 믿는 선배는 믿을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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