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최은영/문학동네/2019
가끔 내 감정이 너무 메말라서 기계가 된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특히 오랜 일이 끝났을때….? ㅎㅎㅎㅎ 휴 그럴땐 소설이 읽히지도 않거니와 읽는다고 해도 전혀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인솔 끝나고 다시 읽어보니까 울컥하는- 마음이 드는 구절이 많다. 최은영 작가님도 정말이니 넘나 대단하고 글 잘 쓰시는듯,,, 넘 조아.
나도 알아, 그 마음. 윤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혼자를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찾게 될 때가 있잖아. 그게 잘못은 아니지. 외롭다는 게 죄는 아니지. 알면서도 왜 네가 그러고 지내는 모습을 견디기 힘들었을까. 너에게서 내 모습이 보여서였나봐. 그게 너무 지긋지긋해서 그랬나봐. 나도 그랬으니까.
그 관대함은 더 가진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태도라고 그떄의 나는 생각했다. 비싼 자동차나 좋은 집보다도 더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자아를 부수고 다른 사람을 껴안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나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영혼은 ‘안전제일’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상처받으면서까지 누군가를 너의 삶으로 흡수한다는 것은 파멸.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쓴 영혼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사랑이라는 말이 참 더럽다고 생각했어. 더러운 말이라고. (...)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알리바이로 아무 짓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계곡의 바위에 앉아서 우리는 하던 말을 모두 접고 물 흐르는 소리와 바람에 나뭇잎들이 쓸리는 소리를 들었다. 비를 맞은 낙엽이 흙에 섞이는 냄새를 맡았다.
어떤 사람들은 벼랑 끝에 달린 로프 같아서, 단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안도감을 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모래도 내게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나를 세상과 연결 시켜준다는, 나를 세상에 매달려 있게 해준다는 안심을 준 사람이. 그러나 모래에게도 내가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래도 우린 중력과 마찰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구나. 가다가도 멈출 수 있고, 멈췄다가도 다시 갈 수 있는 거지. 영원할 순 없겠지만.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를 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떄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 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그날 모래의 말과 눈물이 나약함이 아니라 용기에서 나왔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닫게 됐다.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도.
어른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같이 증오할 사람 하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산다는 건 이상한 종류의 마술 같다고 혜인은 생각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존재가 나타나 함께하다 한순간 사라져버린다. 검고 텅 빈 상자에서 흰 비둘기가 나왔다가도 마술사의 손길 한 번으로 사라지듯이. 보통의 마술에서는 마술사가 사라진 비둘기를 되살려내지만, 삶이라는 마술은 그런 역행의 놀라움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마술. 그건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는 가지만 다시 무에서 유로는 가지 않는 분명한 법칙을 따랐다. 그 룰을 알고 있는 이상 그저 꽃이 필 때 웃고 비둘기가 마술사의 손등에 앉아 있을 때 감탄할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사람이라는 보다는 길거리에 널브러진 비닐봉지 같은 존재였다고. 바람이 불면 허공으로 날아갔다가 가까운 나뭇가지에 아무렇게나 걸려버리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가고 있었다고 말이다.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작은 블록 하나가 빠진 거야. 아주 작은 블록이었는데 그게 빠져 버리니까 중요한 부분이 무너진 거지. 근데 본인은 자기가 엉망이 된 것도 모르는 거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투명하게 알아낼 수 있는 세상의 일이 얼마나 될까.
불교에선 그러더라. 운회를 거듭해서 동물이 인간이 된다고. 그리고 인간이 되어서야 깨달음을 구할 수 있다고. 그런데 난 모르겠어. 반대로 인간이 맨 밑바닥에 있는 거 아닌가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