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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aya Sep 12. 2015

걷는 것만 생각해, 남은 거리는 중요하지 않아@Peru

6개월 중남미 여행_88일째: 산소까지 마시며 해발  4625m를 향해!

벌써 여행 88일째, 이제 세 달 차 여행자 다 되었다. 여행 세 달, 어디 가서 꿀리지 않을 정도의 여행경력이랄까? 항상 여행자들과의 대화는 얼마나 여행을 했는지, 또 얼마나 남았는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거기에서 '세 달  이나요?!'라는 대답이 나올 때의 기쁨- 같은 것이 있다. 흐흐.  역시나 여행 또한 남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라는 욕구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어쨌거나, 세 달에서  마무리될  뻔했던 나의 여행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면서 페루로 향하게 되었다.



페루에 대해 별 계획도 생각도 없던 나는, 69 호수와 빙하가 있는 와라즈 Huaraz에 친구를 따라갔다. 친구따라 강남 가는 것도 아니고, 흐아. 갈라파고스에서 만났던 오빠도 우리와 함께 69 호수를 가겠다며 리마에서 8시간 버스를 타고 와라즈로 왔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도 등산을 전혀- 하지 않는다. 산보다는 바다를 좋아해 항상 바다에 누워있기만 좋아했지, 내 평생에 오른 산이라고는 신입사원 교육 때 갔던 인등산과 지리산  둘레 길 뿐이었다. 그 조차도 감기에 걸려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훌쩍거리며, 걸었기에 썩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얘기를 들으니 69 호수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해발 4625m 의 고산증에다가, 초급자에게는 쉽지 않은 코스라고 다들 겁을 주었다. 잔뜩 겁에 질린 나는 호스텔의 삼 형제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는 69 호수까지가 너무 힘들다고 생각되면 중간의 폭포까지만 오르고 내려가도 된다고 했다. 결국 걱정을 한 가득 안고, 내일 출발하기로 한다.



겁이 나서 인지, 설레어서인지 새벽 두시까지 뒤척거리다 잠이 들었다. 그리곤 4시 반 기상, 버스를 타고 산 근처의 호수에서 근사한 야외 아침을 먹는다. 그런데  근사하기는커녕 너무 추워서 벌써 집에 돌아가고픈 생각이 든다. 엉엉. 다시 차를 타고 30분쯤 올라가니 내리란다. 드디어 트레킹 시작!  30분쯤 올라가니 첫 번째 포인트라고 했던 폭포가 보인다. 이미 우리는 4000m에 다다른 곳에서 트레킹을 시작했기 때문에 고산증이 오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여자가 먼저 포기하고 내려간다. 앗, 포기한다면 지금 타이밍인 것 같은데... 생각하다 가이드 레오에게 힘들다며 얘길 꺼냈다. 그랬더니 레오가 내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소라, 너 멀쩡해~ 할 수 있어.  가자!"라고 말한다. 응???? 아까 오스트리아 여자애는 그냥 가라고 하더니 난 왜?!?! 게다가 레오는 페루에 오는 많은 한국 여행객 덕분에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한국말로 "할 수 있어!  가자!"라고 하는데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젠장.


결국 나는 그 날의 열등생으로 레오의 호위를 받으며 찬찬히 한발 한발 나아갔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정신이 아득해졌다. 실제로, 내 머릿속에서 산을 올랐던 기억은 드문드문 비어 있다. 나는 2-3분에  한 번씩 멈춰서 숨도 못 쉬고 헉헉대면서도 계속해서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레오는 내게


"걷는 것만 생각해. 남은 거리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라고 말했다. 눈물이 목 끝까지 차오른 나를 레오가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새삼 산을 타면서 내가 얼마나 목표지향적인 사람인가를 생각했다. 자꾸만 호수가 얼마나 남았냐고 묻는 나와, 걷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레오. 나 스스로를 '현재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목표에 집착하고 있었다. 레오의 충고를 받아들여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해탈이라는 것이 이런 비슷한 것일까? 목표 따위는 잊은 채, 묵묵히 걷기만 했더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아무래도 내가 안돼 보였는지 레오는 산소를 마시라고 했다. 뜯지도 않은 산소캔 이라니! 그런데 정말 입에 산소를 넣으면 그 순간, 번개처럼 정신이 돌아온다. 그러나 2-3 분 후면 또 제자리이다. 산소를 계속 마시면 그것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에 많이 마시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나는 결국 두 번의 산소공급을 받고 해발 4625m 의 69 호수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친구들(그래 봤자 만난 지 열흘 된..)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고 올라갔는데, 반가운 얼굴을 보니 눈물샘이 터져버린 것이다. 친구들은 내가 절대 못 올 줄 알았다며 나의 등반을 나보다 더 기뻐해 주었다. 결국 나는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꽤나 목표지향적인 사람이었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나는 그것이 나의 장점인 줄 알았다. 실제로 그것은 장점이었다. 그로 인해 무언가를 배우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빠르게 진행되었곤 했으니까.


그래도 가끔은,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오는가 보다. 페루에서의 그 날처럼.


아아.. 여긴 어디? 나는 누구?


* 나중에 레오에게 왜 나만(!) 못 내려가게 했냐고 물었더니, 입술 색을 보면 안다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여자는 입술이 파랗게 질려 내려보냈지만, 나는 입술이 빨갛길래 괜찮은 줄 알았다고. 사실, 난 그날 한국에서 가져간 틴트... 강력 틴트를, 그것도 오렌지색으로 바르고 갔다. 하하하핳핳핳. 토니틴트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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