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_ 페터 회_ 마음산책_
얼마 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김제동의 톡투유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매우 조그맣던 아이는 꿈을 묻지 말아 달라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가슴이 철렁- 했다. "아직 꿈꿀 수 있잖아요-"라는 말이 가슴이 내리 꽂혀 아릿아릿했다. 왜 우리 어른들은 언제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고받고파 하시는 걸까?
그러다 몇 년전 읽었던, 이 책의 한 구절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이들을 깡통 따개로 따서 안에 뭐가 들어있나 살펴보고는, 더 쓸모 있는 잼으로 바꾸려는 시도.
스스로의 잼에 곰팡이는 없나 살펴보시길 바란다.
널리 알려진 생각으로는 아이들의 마음은 열려 있고, 진정한 내적 자아는 밖으로 저절로 스며나온다고 한다. 그런 말은 죄다 틀렸다. 아이보다 더 비밀스러운 사람은 없으며, 아이보다 더 절실하게 비밀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도 없다. 그것은 항상 아이들을 깡통 따개로 따서 안에 뭐가 들어 있나 보면서 그 안을 더 쓸모 있는 잼으로 바꿔줘야 하는 게 아닌가 궁금해하는 세상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럼 갈망에 대한 수학적 표현이 뭔지 아세요? 음수예요. 뭔가 잃어버리고 있다는 감정의 공식화. 인간 의식은 더욱더 확장하고 아이들은 그 사이의 공간을 발견하죠. 돌 사이, 사람들 사이, 그리고 숫자 사이. 정수에 분수를 더하면 유리수가 돼요. 인간 의식은 거기서 멈추지 않죠. 이성을 넘어서고 싶어 하죠. 인간 의식은 제곱근을 풀어내는 것 같은 기묘한 연산을 더 하게 돼요. 그럼 무리수가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과도기 동안 망가져 간다. 스코레스비순에서는 겨울이 여름을 잠식해갈 때 서로 권총으로 머리를 쏘기도 했다. 일이 잘 되어가고 있을 때, 균형이 성립되었을 때 타성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것은 새로운 것이다. 새로운 얼음, 새로운 빛, 새로운 감정.
이 순간, 세탁 건조기 앞에서 나는 그 설명할 수 없는 내 청춘의 기억, 다시는 그 달콤함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기억에 매달려 있었다. 죽음이 나쁜 것은 미래를 바꿔놓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를 기억과 함께 외로이 남겨놓기 때문이다.
나는 일생 동안 지속될 것이라 여겨지는 그런 현상들에는 능하지 않다. 종신형, 결혼서약, 종신직. 그런 것들은 삶의 단편들을 고정시켜 시간의 흐름에서 면제시키려는 시도다.
탁자 너머로 나는 그의 턱 옆을 어루만지며 삶이 갑자기 우리에게 완벽한 타인과 함께 행복한 희열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방식에 대해서 경탄했다.
어떤 순간이 되면 이해가 찾아온다. 이해는 언제나 비언어적이다. 무엇이 낯선 것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 설명하려는 충동을 잃어버린다.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그 현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우리에게 말해 줘'라고 사람들은 내게 와서 말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문제를 이해하고 끝맺을 수 있잖아'라고.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끝맺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뿐이다. 결코 결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끝)
김제동과 여중생 윤지의 대담: http://tvcast.naver.com/v/582908
원제: Frøken Smillas fornemmelse for s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