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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르베 Oct 13. 2021

새 살이 돋을 때까지 기다림이 필요한 마음

<무릎 딱지>

예전에 TV에서 연예인 한 분이 우리나라 장례절차가 너무 좋아졌다면서, 가족을 떠나보내는데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는 우리의 장례문화에 공감이 되어서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특히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다는 건 정말 깊은 슬픔이고,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인데 휘리릭 수습만 하면 되는 절차라고 여기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러면서 충분히 슬퍼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되어서다.


<무릎 딱지>는 엄마의 죽음을 경험한 아이의 이야기다.

‘엄마의 죽음’ 이라니. 소재만으로도 충분히 슬픈데, 그림책 전체가 붉은색인 것도 모자라 곳곳의 글자마저 붉은색이니 그 슬픔의 깊이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힘들까. 그런데 슬퍼하는 아이 대신 짜증과 화가 잔뜩 난 아이가 그림책에 보인다.


“엄마는 저 세상으로 영원히 떠났어.”

“흥! 잘 떠났어. 속 시원해!”


자기가 빵에 꿀을 어떻게 발라먹는지 아빠에게 알려주지도 않고 가 버린 엄마에게 투덜거리는 아이.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일 거다. 그런데 그 아이가 아빠를 돌봐주겠다고 나섰다. 엄마가 없으니 자신이 아빠를 돌봐야 한단다. 아이의 마음도 괜찮지 않을 걸 알기에 아빠를 보며 웃는 아이 얼굴을 바라보는 일 조차도 어렵게 느껴진다.


그런 아이에게도 엄마의 빈자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나는데도 달려와 괜찮은지 물어봐 주는 사람이 없고, 집 안 곳곳에 겨우 남아 있던 엄마 냄새마저 하루하루 옅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냄새를 지키고 싶어 아이는 집 안의 문을 닫는다. 그 모습에서 엄마의 부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이가 보인다. 마치 엄마의 부재를 인정해버리는 순간이 무서울 정도로 깊은 슬픔이 올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할머니와 아빠에게 차를 대접한다. 엄마가 했던 것을 보고 따라 하는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아이의 할머니와 아빠의 표정을 보니 엄마의 부재를 차마 마주하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을 걱정했던 내 마음과 닮아 보인다.

할머니가 집안이 덥다며 아이가 닫아놓은 문을 모두 열어버렸다. 그 순간 아이의 슬픔도 창문이 열리듯 한 순간에 터져버렸다. 드디어 엄마의 부재를 마주한 아이가 몸무림을 치며 운다. 끝도 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안돼! 열지 마. 엄마가 빠져나간단 말이야.”



그림책 속 아이가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났다. 아이처럼 넘어져 본 기억으로 나의 상처를 기억해본다.


피가 난 상처.

피는 곧 멈추겠지만 한 동안 상처가 난 자리가 쓰라리고 불편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상처 위에 딱딱한 딱지가 생기는데 그 딱지가 불편하고 간지러워 손을 대다 보면 딱지가 떨어질 때가 있다. 미처 아물지 못한 상처 일 경우, 또다시 피가 나게 되고, 그러면 또다시 쓰라리고, 또다시 불편하고, 또다시 새로운 딱지가 생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떨어질 딱지. 상처가 있던 자리에는 새 살이 돋고 그 새 살은 흉터로 남는다.


슬픔이란 감정도 이렇게 상처가 아무는 과정과 비슷해 보인다. 아프고 쓰라리고 불편한 마음. 덤덤해지다가 또다시 슬퍼지는 마음. 그런 마음을 남겨진 흉터처럼 가지고 살아가는 마음.


아물고 새살이 돋는데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슬픔에도 충분히 슬퍼할 시간이 필요하가 생각하면 좋겠다. 쓰라림과 괜찮음이 반복되는 것처럼 쉽게 해결되는 감정이 아니라 원래 그런 거라 생각하면 좋겠다. 딱지가 떨어진 뒤, 새살이 돋아 생긴 흉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처럼 슬픔도 나와 함께 가야 하는 감정이라 생각하면 좋겠다.


아이의 할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아 가슴 위에 올려주며 말했다.


여기,  들어간  있지? 엄마는 바로 여기에 있어. 엄마는 절대로 여기를 떠나지 않아.”


할머니의 말에 아이는 '두근두근', '콩닥콩닥' 가슴의 움직임과 소리로 엄마를 껴보기로 한다. 아이의 아빠는 아이의 빵에 꿀을 지그재그로 바르는 법을 할머니에게 배웠다. 그렇게 남겨진 가족들에게 조금씩 새살이 돋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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