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활동] : 눈을 감고 터치! 터치!
<눈을 감고 느끼는 색깔 여행>
글: 메네나 코틴/ 그림 : 로사나 파리아/ 옮김 : 유 아가다 / 고래 이야기
어둠 속의 대화
결혼 전 다니던 직장에서 직원들과 단체로 <어둠 속의 대화>라는 체험전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오래 전임에도 당시의 느낌이 강렬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일행 몇몇이 팀이 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전시장 속으로 들어가면서 체험이 시작된다. 어둠 속에 들어간 뒤 적응이 되면 무엇이라도 보일 줄 알았는데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둠 속에는 우리 팀을 안내해 줄 ‘로드마스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나긋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꽤 의지가 되었다. 어둠 속에서 가야 할 곳과 해야 할 것들을 섬세하게 설명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일행 중 누군가 넘어지거나 부딪히는 사소한 소리에도 반응하고 괜찮은지 물어봐주니 당시 느끼기에 로드마스터는 열화상 카메라 같은 도구가 있어 우리를 보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체험 중 어둠 속에서 맛으로 음료의 종류를 구분하는 시간이 있었다. 내가 더듬거리다 음료를 쏟자 그걸 알아차리고 바로 옷이 괜찮은지 물어봐주니 열화상 카메라 같은 도구를 갖고 있을 거라는 추측은 확신이 되어버렸다.
어둠에 조금 적응이 되나 했는데 체험이 끝났다고 했다. 30분도 안 되는 전시라 생각하며 아쉬워했는데 로드마스터의 설명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 짧다고 아쉬워했던 시간이 100분의 시간이었다는 것과 로드마스터에게는 열화상 카메라 같은 일체의 도구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체험을 마치고 빛이 있는 세상으로 나왔을 때, 약간의 현기증과 낯선 곳에 다녀온 듯한 어리둥절함에 전시장 앞 의자에 앉아 오랫동안 멍하게 앉아있던 기억이 난다.
사과주스라 쓰여있기에 사과맛이라 믿으며 마셨고, 불편해 보이는 길은 자연스럽게 피해 다녔던 일상이었다. 늘 당연하게 눈으로 보고, 때로는 눈으로 본 것이 전부인 것처럼 믿으며 지냈는데 다른 감각에 의존하려니 낯설고 생소했다. 볼 수 없기에 사소한 냄새가 궁금하고, 손에 닿는 낯선 촉감에 움직임이 느려지고, 작은 소리에도 귀가 쫑긋해지니, 신경이 곤두서 피곤함도 생겼었다. 이 어리둥절한 100분의 낯선 경험이 아직도 생생한 거 보면 시각의 의존도가 감각의 일상에서 꽤 높은 비중이라는 것이 실감 난다.
색깔이 없는 색깔 그림책
<눈을 감고 느끼는 색깔 여행>은 색깔이 없는 색깔 그림책이다. 색깔이 없는 대신 그림책 속에는 약간의 요철이 느껴지는 이미지와 색깔을 설명하는 ‘활자’와 ‘점자’가 있다. 그렇다 보니 이 책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군가 읽어주는 그림책 이야기를 들으며 손끝으로 이미지를 느껴보는 것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오로지 시각에 의지하고 있는 ‘색’을 촉각과 청각으로 받아들이려는 시도 자체가 다소 불편하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점점 섬세해지는 손끝에 색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르니 결국에는 '보이는 색’이 아니라 나에게 ‘느껴지는 색’이 기억에 남게된다.
-내 이름은 토마스, 내가 어떻게 색깔을 느끼는지 들어볼래?
-노란색은 코를 톡 쏘는 겨자 맛이고, 병아리 솜털처럼 보들보들한 느낌이야.
토마스라는 아이가 자신이 느끼는 갖가지 색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는 눈이 안 보이기에 생기는 불편함이 아니라 눈이 안 보이기에 다르게 느껴지는 풍부한 상상력에 가까우니 어떻게 토마스가 색을 느끼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노란색을 코를 톡 쏘는 겨자 맛이고, 병아리 솜털처럼 보들보들한 느낌이라고 하니 어쩌면 곁의 누군가가 병아리를 만지게 해 주며 노란색이라 설명해 주었을지도, 겨자를 맛보게 하며 노란 겨자색을 알려주었을지도 모른다. 시각을 뺀 나머지 감각에 의지해 색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니 색은 나의 경험이 담긴 풍부한 이야기가 된다.
-갈색은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야.
-초콜릿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가끔 고약한 똥 냄새도 나.
눈을 감고 느끼는 아이의 얼굴
‘눈을 감고 느끼는 아이 얼굴은 어떨까?’
매일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아이가 집에 둘이나 있다. 몸 구석에 작은 점이 어디 있는 줄도 알고 얼마 전에 빠진 유치 자리에 영구치가 어느 정도 자랐는지, 머리칼은 자를 때가 되었는지 등 눈으로 보아 알게 된 아이들의 모습을 나는 기억하고 되새긴다. 익숙한 방법으로 본 익숙한 아이의 모습이 눈이 아닌 다른 감각에서는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해졌다.
“우리, 서로 눈 감고 얼굴 만져보기 해 볼까?”
책을 보고 난 뒤,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가 먼저 해 보겠다 하며 반듯하게 누운 아이의 아이의 얼굴 구석구석을 눈을 감고 만져봤다. 아이는 나의 손길이 간지러운지 큭큭대면서도 웃지 않으려 애쓰며 얼굴을 내어주었다. 손 끝에 아이의 눈썹이 닿았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볼의 느낌과 콧등의 굴곡도 만져보았다.
“여기 눈썹이 좀 거칠거칠하고요.”
“볼은 탱탱하고 부드럽네요.”
“콧등은 딱딱하기도 하고 움푹 들어간 부분도 있어요.”
아이가 간지러운지 얼굴을 씰룩거렸다.
“갑자기 얼굴이 울룩불룩 움직이고 있어요.”
아이의 웃음이 터졌다. 웃는 아이의 얼굴에 코를 갖다 대었다.
“우성이에게는 이런 냄새가 나는구나.”
아이의 얼굴을 만지니 차가운 부분도 있고, 따뜻한 부분도 있었다.
“볼은 차갑고 이마랑 귀는 따뜻하네. 엄마가 차가운 부분을 따뜻하게 해 줄게.”
양 손을 있는 힘껏 비벼 열을 낸 뒤에 아이의 차가운 볼에 갖다 대니 아이가 본인도 해주겠다며 양 손을 비볐다.
손 끝에 전해지는 따뜻함과 차가움, 거칠고 부드러움, 움직임과 냄새, 소리까지 늘 보는 아이 얼굴인데 새로운 기억이 남았다. 만약, 내가 아이를 볼 수 없는 날이 온다면, 이런 느낌으로 아이를 기억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드니 좀 더 천천히, 꼼꼼히 느끼고 싶어졌다. 매일 보기에 익숙해서 소중한단 생각이 무심히 지나갔던 아이 모습이 특별하게 기억되던 날이었다.
잠들기 어려운 달콤한 밤
<눈을 감고 느끼는 색깔 여행>을 함께 본 뒤로 종종 자기 전에 아이들의 얼굴을 만져본다. 자기 전에 어떤 얼굴인지, 오늘 잘 지낸 얼굴인지 살펴보자는 말로 더듬더듬 하니 그 손길에 아이들이 숨 죽이며 웃는다.
며칠 전, 자기 전에 불을 끄고 첫째 아이의 얼굴을 만져보려고 허공에 손을 뻗을 때였다. 수면등의 빛 때문에 내 손이 까맣게 보였다. 어둠 속에서 보는 그 손이 꽤 신비롭게 보여 손바닥에 마법가루 뿌리는 시늉을 하며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오늘 좋은 꿈 꾸며 잘 수 있게 마법가루를 뿌려줄 거야. 잘 봐! 샤랄랄라! 샤랄랄라!”
마법가루가 채워진 두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이 전처럼 아이 얼굴 구석구석을 살폈다. 오늘은 어떤 얼굴인지, 오늘은 어디가 차갑고, 어디가 따뜻한지 만지던 때였다. 아이의 장난이 발동했다. 갑자기 뒤를 돌아 뒤통수를 얼굴인 양 내미는 아이에게 모르는 척 속아주며 말했다.
“어! 오늘은 얼굴이 많이 거칠거칠하네. 털이 많아졌어.”
둘째 아이가 자고 있어 크게 소리 내지 못하는 우리는 낮은 소리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이가 제법 그 시간이 좋았는지 갑자기 어둠 속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엄마 나 봐봐요. 나도 엄마 좋은 꿈 꾸며 자라고 마법가루 뿌려 줄게요.”
어둠 속에서 아이의 실루엣과 희미한 모습이 보였다. 아이가 가슴에서 마음의 문이라며 여는 시늉을 한다. 그 안에서 하트를 ‘똑!’ 떼어내고, 두 손에 마법가루를 ‘샤랄랄라’ 뿌리고 ‘쓱쓱’ 한참 비비더니 내 가슴 위에 두 손을 대었다. 아이의 손에서 나온 열기가 몸에 퍼지는 게 느껴져 기분이 좋아져 몸이 부푸는 것처럼 손을 크게 만들었다.
"이야! 진짜 기분 좋다! 이것 봐! 따뜻하고 기분이 좋아서 몸이 부풀고 있어. 엄마도 해줄게! 누워봐 봐.”
나도 아이를 따라 했다. 아이가 한 그대로 마음을 열고 하트를 ‘똑’ 떼어내어 마법가루를 ‘샤랄랄라’ 뿌리고 힘껏 비빈 두 손을 아이 마음에 갖다 대었다. 내가 느낀 온기를 아이도 느꼈을까. 기분이 좋아진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는 히어로 책 보다 그림책이 좋아요.
"그래? 왜?"
"그림책을 보면 엄마가 좋은 마음이 더 커지거든요."
아,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였는지. 마음이 몽글몽글 해졌다. 아이와 그림책 읽는 묘미를 또 한 번 느낀다.
"엄마 얼굴 한번 만져봐."
입꼬리를 늘려 웃는 표정을 만들고 아이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아이의 조그마한 두 손이 나의 얼굴 곳곳에 닿았다.
"여긴 동글동글하고 여긴 좀 차갑고 입은 길어졌고 닫혀있네요. 여기는 또......"
아이가 나의 얼굴을 더듬더듬하며 말했다.
"지금 만지고 있는 얼굴이 엄마의 웃는 얼굴이야. 우성이가 오늘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줘서 엄마 얼굴이 이렇게 웃고 있어."
어둠 속에서 아이와의 사랑 나눔이 길어졌다. 신랑이랑도 이런 사랑을 속삭여본 적 없는데 이렇게 마음이 녹는 밤이라니. 달콤해서 잠들기 어려운 밤, 그 날 우린 꽤 늦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