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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래토드 Jan 29. 2024

곰돌이가 꿀 섞는 거는 언니 거잖아

아이는 이렇게 바라본다


"곰돌이가 꿀 섞는 거는 언니 거잖아!"


"어?"


뭐가 잘못된 건지,

또 이 녀석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서

잠시 멍해져 있는데

막내가 고사리 같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컵의 그림을 가리킨다.


"봐요. 곰돌이가 꿀을 섞고 있잖아요."


당연한 것을

엄마는 왜 모르냐는 듯한 눈빛으로

아이가 나를 쳐다봤다.

컵의 손잡이를 살펴보니, 숫자 1 모양이었다.  


'아하! 숫자 1은 00이 거지.'

나는 그제야 컵을 잘못 준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사용하고 있던 캐릭터 물컵은

손잡이가 숫자 1, 2, 3 모양으로 되어있었다.

선물로 받은 물컵이었는데, 마침 세 개라서

숫자 1은 첫째, 숫자 2는 둘째,

숫자 3은 막내가 쓰기로 했었다.


세 아이들 모두 자신의 컵을 잘 찾아서 썼는데,

오늘 아침 설거지 후에 건조대에 올려놓은 컵을

막내가 내려 달라기에

내가 그만 실수로 1번 컵을 주었던 것이다.



아직 숫자를 잘 모르는 막내는

컵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고

누구의 것인지 알아내고 있었다.


"꿀을 섞고 있는 곰은 00 언니 거,

풍선 주는 곰은 00 언니 거,

비행기 운전하는 곰은 내 거~"



막내의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컵을 살펴보니

말마따라 너무 귀여운 그림들이

각각의 컵에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었다.


컵을 사용한 지 세 달이 넘었는데

나는 이 귀여운 그림들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

심지어 컵에 그림이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컵을 그동안 숫자로만 구분했던 것이다.

별일 아닌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 묘하게 마음이...



아...

이런 식으로 내가 지나친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내가 못 보았던 이면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각각의 표정이 있었을까?



숫자와 글자를 익히기 전의 어린 나는

무엇에 시선을 두며 살았을까도

떠올리고 상상도 해보며,


계좌에 찍히는 숫자만 바라보며 살다 보면

언젠간 사람도 보이지 않겠구나

그렇게 조금 더 연관 지어서도 생각이 들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끊임없는 능선을 가진 이곳 시골의 풍경이,

누구의 면인지도 모를 자연의 오묘한 레이어가

오늘 새삼 보배롭다.

  

하늘 바람 구름

빛 새 나비

동선과 레이어로 말을 배워가는

이 보배롭고 어여쁜 어린아이의 눈을 

조금이라도 더 마주쳐 보며

오늘도 삶을 다시 배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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