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자매 Aug 05. 2019

치열한 리모델링과 그 후의 일상 1

미니멀리즘이 뭔가요, 먹는 건가요?


리모델링이 끝나고 이사가 시작되었다.

이번 집은 미니멀리즘으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직전 보광동 집에서 이년 반을 살면서 처절하게 느꼈다. 깊숙이 넣어놓은 물건들은 결국 필요하지 않다는 것.

까치발을 들어 넣어야 할 물건들은 사실 버려야 할 물건들이라는 것.


그래서 이번 집에는 오히려 수납공간을 억지로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항상 쓰는 물건들만 넣어둘 수 있는 최소한의 수납공간만 만들어 두었다. 옷장 하나, 싱크대 상/하부장, 욕실 수건 수납장이 전부였다. 수납장에 들어가지 않는 물건들은 자비 없이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J실장님은 수납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며 걱정하셨지만 직전 두 번의 이사에서 엄청나게 많은 짐들을 버렸고 대형 짐이라고는 싱글 침대 하나, 6인용 테이블, 세탁기가 전부였기에 자신 있었다.

 

이삿날이 되었다. 큰 짐이 몇 개 없다며 이삿짐 아저씨께도 수월하실 거라고 말씀드려 놓은 터였다.

하지만 저 멀리서 오는 트럭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짐을 잔뜩 채운 트럭이 한 대, 그리고 또 한 대 도착했다. 크고 작은 가구들을 뺀 잔짐만 60박스였다.


세 달 동안 리모델링 때문에 친구 집에 얹혀살면서 늘 필요한 물건은 이미 캐리어에 다 가지고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저 엄청난 짐들은 도대체 뭐지. 분명 내 짐이 아닐 것이라고 부정하며 박스를 하나씩 개봉했는데 (놀랍게도) 다 아는 물건들이었다. 만약 통째로 분실했다고 해도 기억해내지 못했을 짐들이 트럭 두 대를 가득 채워 마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짐들이 마치 적군처럼 밀려 들어왔다


14.5평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공간에 대형 택배 박스 60개를 공간마다 놓아두니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충 박스 60개를 카테고리별로 분류해보니 주방 쪽 박스가 스무 개, 옷이 스무 개, 책이 다섯 개, 욕실용품이 다섯 개 정도였고 도저히 분류할 수가 없는 기타류가 열박스 정도 되었다.


일단 주방 쪽 박스부터 하나씩 개봉했다. 수십 개의 양념통들이 들어있는 박스가 나왔다. 한국뿐 아니라 이탈리아, 일본, 오스트리아, 베트남, 태국, 중국 등 세계 양념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행 다니면서 현지의 음식 맛에 반해 '이건 꼭 사야 한다'며 캐리어에 바리바리 싸온 것들이었다. 당장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해도 될 정도로 다양한 양념들이 완비되어 있었지만 (사실 우리는 집에서 거의 밥을 먹지 않는다). 게다가 아이러니한 건 이 많은 양념들 중에 된장과 고추장은 빠져 있었다는 것(막상 제일 필요한 건 또 없다).


다음 상자에서는 컵과 접시들이 나왔다. 직전 집에서 접시세트를 네 번 구매했다. 한 세트만 남겨놓고 싶었지만 세트마다 용도가 달랐다. 어떤 시리즈들은 편평해서 반찬을 남기에 좋았고, 어떤 시리즈는 오목해서 국물 요리를 담기에 좋았다(결국 하나도 버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유리컵들은 또 어떤가. 총 여섯 세트였다. 용도는 동일하지만 세트마다 각자의 예쁨이 있었다(그래서 이 역시 하나도 버리지 못했다).


냄비 상자에서도(훠궈용 반반 냄비도 있었다),

와인잔 상자에서도(유리잔 외 피크닉에서 쓸 수 있는 플라스틱 와인잔까지),

일회용품 상자에서도(배달음식을 얼마나 시켜먹었는지 일회용 수저, 물티슈, 빨대가 가득),

모든 상자의 정리가 이상형 월드컵을 방불케 했다. 결국 스무 박스 중에 독한 마음으로 쓰레기통에 넣은 건 도자기 컵 몇 개뿐이었다.


정리가 끝나고 찬장을 열어보니 (당연한 결과겠지만) 찬장마다 물건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손이 닿지 않는 찬장 깊은 곳에는 물건을 넣지 않겠다던 내 다짐도 물건들과 함께 저 깊이 쑤셔 넣었다.


그나마 수납공간이 가장 많았던 주방이 이런 상황이니 다른 곳은 아비규환이었다. 여름옷밖에 정리하지 못했는데 옷장이 가득 찼다. 욕실의 외부 선반에는 (당초 계획대로라면) 호텔처럼 같은 용기에 어메니티 3종만 줄 세우는 것이었으나 막상 욕실용품 상자를 열어보니 우리가 평소에 쓰는 욕실용품은 비단 세 가지만이 아니었다.

샴푸, 트리트먼트, 바디워시, 바디 스크럽, 바디크림, 바디 타월, 바디 미스트, 립&아이 리무버, 클렌징 오일, 클렌징 폼, 전동 클렌저, 온천수 가루, 제모기, 각종 기초제품들까지.

이런 과정을 거쳐 욕실 선반 마저 꽉 차게 되었다.


스무 박스 정도 남았지만 집의 모든 수납공간은 이미 용량 초과였다. 더 이상 정리할 수 없는 짐들이 공간마다 널브러져 있었다. 결국 아직 입주 전인 지하와 옥탑에 개미처럼 짐을 옮겨다 놓았다. 플리마켓 열어서 팔자고 김장봉투에 안 입는 옷들도 분류해놓았다. 그렇게 많이 버렸는데 여섯 봉투나 나왔다


그럼에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수많은 겨울옷들과 잔짐들을 위해 결국 동생과 수납 침대를 샀다. 퀸사이즈 수납 침대는 괴물 같은 수납 용량을 가지고 있었다. 침대 크기의 옷장이 들어온 것과 같은 효과였다.

겨울 옷들, 겨울용 이불들(이불은 부피가 엄청나게 크다) 그리고 분류되지 못한 기타 짐들이 전부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단단히 수납하고 그 위에 끙끙대며 매트리스를 올렸다. 매트리스는 돌처럼 무거웠고, 이대로 침대 밑 물건들은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책장이 없어 이사 오고 이 주간 책들을 그냥 창가에 쌓아놓았다. 거실이 좁아서 기성 제품 책장을 놓으면 더 좁아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뇌하는 우리를 보다 못한 J실장님께서 창가 사이즈에 딱 맞는 날씬한 책장을 하나 만들어주셨고 비로소 마지막 책짐까지 정리되었다.


모든 짐을 정리하기까지 꼬박 이주가 걸렸다. 엄밀히 말하면 당장 보이지 않는 곳에 잘 숨겨놓았다.

너무나 멀쩡한데 그저 주인을 잘못 만나 착용되지 못하는 옷 짐 여섯 봉투만 남아 플리마켓 열릴 날만을 기다리며 현관을 가로막고 있다.


이쯤에서 다시 책 '월든'을 소환해본다.


당신 앞에 새로운 일이 펼쳐진다면 헌 옷을 입고 시작해 보라.
모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지 어떤 물건을 갖추는 게 아니다


월든의 구절은 언제나 나의 인생에 경종을 울리고, 나는 요새 인견 이불 검색에 꽂혀있다(인과관계 무엇).

지금 쓰는 이불도 충분히 예쁘지만 면이라서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 있다.

인견이불을 사게 되면 지금 쓰는 여름 이불은 어떻게 되는 걸까 생각해본다.

먼저 깨끗하게 세탁 후에 반듯하게 접어 내 매트리스 밑 거대한 수납공간으로 가게 되겠지. 그리고 잊히겠지.


심적, 체력적으로 리모델링보다 힘들었던 짐 정리를  하고 보니 작은 물건 하나를 사는 것도 망설여진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미니멀리즘은 망했다.


마지막으로 책장 사진(그리고 수많은 피규어들)


작가의 이전글 단독주택 리모델링, 그 우여곡절의 역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