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인데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단독주택을 사고 나서 세 번 정도 앓아누웠다.
첫 번째는 계약서 때문이었다. 이 집을 살 때 내가 해외에 있어서 엄마가 대신 가계약을 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계약서를 자세히 살펴보니 터무니없는 특약조항이 적혀있었다. 잔금을 다 치르고 나서 한 달 뒤에 집주인이 이사를 나간다는 내용이었다. 사람일은 모른다고 집주인이 기한 내에 이사 갈 집을 구하지 못한다면 정말 문제였다.
주위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해보니 하나같이 '절대 이사 나가기 전에 잔금을 주면 안 된다'라고 했다. 이사 나가는 날짜에 잔금을 주겠다는 말을 하려고 부동산에서 모였는데 집주인 아줌마의 인상이 한 마리 맹수 같았다. 부동산 아저씨가 아줌마한테 쩔쩔매는 이유가 단번에 이해됐다.
나와 동생이 '잔금은 이사 나가실 때 드리는 걸로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운을 뗐더니
-이렇게 신뢰가 없는데 무슨 계약이야. 나 기분 나빠서 이 계약 못해. 파기해!
사람 눈에서 레이저빔이 나온다는 게 이런 거구나. 나와 동생이 좋게 말해 말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두 시간 동안 부동산에서 고성이 오고 가고 울며 겨자 먹기로 천만 원을 보증금으로 남겨 놓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사실상 우리의 완전한 패배였다).
잔금 치르고 한 달 내내 나랑 동생은 '집주인이 이사 안 가면 어쩌지'라는 걱정에 잠을 설쳤던 것 같다.
천만다행으로 집주인은 새 집을 구했고 드디어 이삿날 D-1이 되었다. 집주인 아줌마는 성격은 불같았지만 일처리는 똑 부러졌다. 마당과 2층, 옥상에 집주인들의 짐이 흘러 넘 칠 정도였는데 거의 한 달에 걸쳐 깨끗하게 치워지고 있었다.
동생이랑 그동안 괜한 걱정을 했다며 이사 가시는 데 맛있는 케이크라도 사다 드리자고 상의를 하던 중에 마당에서 집주인 아저씨를 만났다. 깨끗하게 짐 치워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더니 이런 대답이 날아왔다. 매우 능구렁이처럼 지나가는 목소리로 말이다.
- 이제 트럭은 벽에 좀 붙여 댈게요. 차 댈 데가 없어서요.
순간 동생과 뭘 잘못 들었나 갸우뚱하며 일단 집에 들어왔다. 배경 설명을 하자면 집주인 아저씨는 초대형 트럭을 모는 일을 하는데 매일 7시부터 다음날 7시까지 대문 앞에 주차를 한다. 큰 차가 매일 대문 앞을 떡하니 막고 있었지만 아줌마와의 정면 대결은 피하고 싶었기에 꾹 참던 차였다.
그런데 이사를 나가도 트럭은 계속 여기에 대겠다고?!
그래서 두 번째로 앓아눕게 되었다.
그 능구렁이 같은 아저씨의 한마디에 바로 대답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동의로 간주되었고 집주인은 이사 갔지만 트럭은 한동안 계속 대문 앞에 주차되었다. 다시 주변 사람들의 자문을 구했다. 친구들보다 친구들 남편이 다들 펄쩍 뛰었다.
이사 갔는데 전 집에 계속 주차하는 양아치가 어디 있냐고. 너희들이 둘 다 여자라 만만하게 본거라고.
만만하게 봤다는 말이 너무 거슬렸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결국 남자 친구한테 SOS를 보냈다. 남자 친구와 호랑이 아줌마의 만남이 바로 성사되었다.
- 계속 여기 차 대시는 건 아니죠, 아주머니.
아줌마는 이번에도 고성으로 맞받아쳤지만 남자 친구가 몇 마디 하니 놀랍게도 바로 꼬리를 내렸다. 남자 친구 등장 5분 만에 집 바로 앞에는 트럭을 대지 않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되었다. 여자라서 만만하게 본 게 맞았다.
그리고 남자 친구가 떠나고 집주인 아저씨와 아줌마가 같이 나를 찾아왔다.
대문 앞 어디까지 차를 대지 못하는지를 놓고 다시 팽팽하게 맞붙었다. 남자 친구가 알려준 대로 어디 어디까지는 안된다고 못 박고 돌아서는데 뒤통수로 아저씨의 굵직한 욕이 꽂혔다. 이번만 참으면 더 이상 트럭을 안 봐도 된다. 그 생각으로 참았다.
가는 말이 고우면 얕잡아본다
그 말이 맞았다.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트럭도, 집주인도 사라졌고(알고 보니 바로 옆집으로 이사 간 건 함정)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되었다. 마당에서 철거한 모습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그땐 몰랐지만 이 사람의 등장으로 나는 세 번째 앓아눕게 된다.
- 여기 사는 사람이에요?
- 네. 누구시죠?
- 저 뒤 A아파트 입주자 대표인데요. 여기 좀 와보세요.
A아파트라면 우리 집에서도 꽤 멀리 떨어진 아파트인데 왜 그러지? 의아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우리 집 외벽을 허물어서 아파트 주민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라는 게 골자였다. 언덕 위 하얀 집 스타일로 담을 싹 허물고 무릎 높이 만한 펜스를 만들라는 거였다.
- 그럼 저희 집 담이 없어서 보안 문제가 생기는데요?
- 우리 아파트에도 얼마 전에 도둑이 들었어요. 도둑은 담 있든 없든 마음만 먹으면 다 들어와요. 그건 막을 수 없어요.
이 어이없는 말을 던지는 A아파트 입주자 대표는 진지했다. 그 이후로도 매일 공사현장에 와서 담 허물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자기 말대로 하지 않으면 아파트 이름으로 공사 민원 넣겠다고 협박을 했다.
이번에는 보다 못한 동생이 나섰다. 동생과 입주자 대표가 마당에서 맞붙었다. 리모델링 실장님 두 분도 같이 있었다.
당시 나는 집 안에서 공사 현장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밖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나가보니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정확히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P실장님이 동생에게 말하는 소리는 들었다.
- 동생분이 이기셨네요.
J실장님도 거들었다.
- 저도 모르게 손을 공손하게 모으게 되네요. 앞으로 잘할게요.
뭔가 진귀한 광경을 놓친 것 같았다. 어찌 됐건 A입주자 대표를 물리친 내 동생. 장하다.
이렇게 세 차례의 홍역이 지나갔다. 이제 이웃 주민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피하게 된다.
앞전 보광동에 살 때 이웃 할머니가 생각난다. 같은 담을 공유하고 있어 할머니 집에서는 우리 집 마당이 훤히 보였다. 쿠팡 아저씨는 우리가 집에 없으면 할머니 집에 벨을 누르고 들어가 담을 넘어 우리 집 앞에 물건을 놔둘 정도였다. 할머니 물건이 우리 집 마당으로 떨어지면 물건과 함께 엄마가 직접 만들어 택배로 보내준 시루떡도 같이 드리면서 우리는 담과 함께 정도 공유했다.
하루는 우리가 마당에 고추, 상추, 방토를 심어놓고 해외여행을 간 적이 있다. 이주만에 돌아왔더니 할머니가 다급하게 말씀하셨다.
애들 다 말라죽는데 사람이 안 보여서 내가 담 넘어 물 줄 뻔했어
항상 우리 집 대문 앞까지 청소해주시고, 나중에 이사 가는데 박스 필요하다고 했더니 매일 아침마다 박스를 구해다 담 너머로 던져주셨던 시크한 할머니.
할머니가 우리에게 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따뜻한 이웃이 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 동네에서는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