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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자매 Sep 03. 2019

치열한 리모델링과 그 후의 일상 2

싸모님들 모임에 초대되다


브런치에 공사일지를 쓰면서 흥미로운 제안이 도착했다.

이름하여 '집주인 모임'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집주인'이라는 단어가 한 사이즈 작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호기롭게 수락했다.

(단순한 뇌를 가지고 있으며 먼저 예스부터 외치고 뒷수습 못하는 스타일임을 인정한다)

 

모임은 이번에 만나는 집주인 중 한 사람의 집에서 진행된다고 했다. 찍어준 주소는 경기도의 한 산 중턱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차로 가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차가 없으므로(사실 면허도...) 지하철을 두어 번 갈아탄 후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간 후 다시 오르막길을 십여분 올라갔다. 이번 모임을 조직한 분이 여러 번 전화를 해서 잘 오고 있는지 묻고 또 물었다. 아마 나 말고 다른 집주인들은 차를 끌고 오는 모양이었다.


그 날은 폭염경보가 내렸다. 안 그래도 편한 옷에 머리만 질끈 묶은 상태였는데 얼굴까지 땀에 젖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열기와 땀으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을 때 핸드폰 길 찾기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라고 안내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보니 웬 대저택이 서 있었다. 한남동에서 본 것 같은 집이었다.


'내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싸한 느낌을 안고 큰 현관문에 들어서니 싸모님들이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반겨주셨다. 다들 입은 활짝 웃고 있었지만 눈은 바쁘게 위에서 아래로 나를 스캔하고 있었다.


여자와 여자가 만나는 그 찰나의 순간, 여자의 뇌는 얼마나 많은 신경정보를 전달하는가. 0.1초 만에 내쪽에 접수된 정보는 다음과 같다.


- 꾸안꾸다. 꾸미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은 꾸몄다.

- 명품 로고가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저 핏은 분명 명품이다. 지하상가의 그것이 아니다.

- 화장은 수수하다. 하지만 피부가 수수하지 않다(저 광채는 피부과에서 최소 주 1회 이상 관리를 받은 피부다)

- 나는 왜 여기...?(발가락에 패디큐어라도 좀 칠하고 올걸...)


집은 더 어마어마했다. 리빙센스, 메종 잡지 표지에서 본 것 같은 집이었다. 단체로 집 내부를 투어 하면서(너무 커서 '투어'라는 말이 적당하다) '어머~'를 합창했다. 일평생 단시간 내 그렇게 많은 '어머~'를 외친 건 처음이었다(집도 물론 예뻤지만 그래야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집 구경이 끝나자 집주인분은 우리를 정원에 마련해 놓은 테이블로 안내했다. 테이블마다 생화가 꽂혀 있었는데 마당에서 꺾어온 것이라고 했다(순간 예전 보광동 집 마당에는 상추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접시도 어쩜 이렇게 예뻐요'를 합창하는 도중 단정하게 세팅된 접시에 트러플 향이 나는 음식이 서빙되었다.


모임을 주최한 분은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요청했다. 이름과 나이 대신 닉네임을 말해달라고 했다.

닉네임이라니.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나에게 닉네임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내 마지막 닉네임의 기억은 중학교 H.O.T 팬클럽 3기 시절 ‘칠현 마누라’가 전부였으나 싸모님들 앞에서 칠현은 H.O.T의 멤버인 강타의 본명이며, H.O.T는 한 때 열병처럼 좋아했지만 이제는 그저 추억의 연예인일 뿐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구구절절했다. 내 차례가 오기 전에 뭐라도 짜내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닉네임이 '배고픈 사자'였다. 사자는 염색을 여러 번 거쳐 거칠어진 머리털이 꼭 사자 갈기 같다며 남자 친구가 붙여준 별명이었고, '배고픈'은 당시 배가 고픈 상태였기 때문에 붙인 형용사였다.

- 안녕하세요. 배고픈 사자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 어머~배사님~반가워요^-^

싸모님은 단번에 '배고픈 사자'를 '배사'로 줄이는 신공을 발휘하셨고, 이 에피소드를 들은 동생과 남자 친구에게 난 그 후로 오랫동안 '배사'로 불리게 된다.


우리의 수다 주제는 '집이 너무 예뻐요'에서 '내가 가본 가장 좋았던 여행지'로 넘어갔다. 나도 '여행 좀 해봤다'라고 나름 자부하는데 내 앞의 사모님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예전에 걸었으며 산티아고 보다는 스위스 트레킹 코스가 더 좋더라'는 여행 보따리를 풀면서 (산티아고 길을 항상 걷고 싶었으나 아직 엄두를 못 낸) 나는 조용히 있기로 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갑자기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상 통역을 하다 보면 사장님들을 볼 기회는 많지만 싸모님들은 처음이었다. 솔직히 사장님들의 삶은 (내가 옆에서 보기엔) 돈이 아무리 많든, 얼마나 영향력이 있든 간에 고달픔, 삶의 애환 같은 게 느껴졌다. 열심히 벌기만 하고 쓸 시간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쪽은 달랐다. 삶을 '누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누린다'라고 느꼈던 부분은 얼마나 비싼 동네에 살며, 집에 얼마나 좋은 가구를 들이는지가 아닌 풍부한 취미생활이었다. 요리, 꽃꽂이, 도예, 여행, 미술, 책 쓰기까지.


나는 개인적으로 인생의 즐거움을 결정하는 것은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자신에게 맞는 취미인지 발견하기 위해서는 결국 하나씩 해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적, 경제적 여유가 꽤나 필요하다.


집을 사고 리모델링을 하면서 잔고가 바닥을 드러냈다. 통역일도 한동안 들어오지 않아 잔고는 도통 채워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진돗개 경보'가 발령된 상황에서 생존과 관련 없는 것들부터 급하게 구조조정해나갔다. 월 23만 원짜리 요가학원과 월 16만 원짜리 중국어학원이 최전방에서 가장 먼저 잘려나갔다. 베이킹 클래스도 듣고 싶고, 독서모임도 다시 다니고 싶고, 미술도 배우고 싶지만 전부 보류 중에 있다.


(돈 때문에) 취미가 사라지고 생존만 남았다. 이번 달에 뭘 했지 되감아보면 딱히 기억나는 게 없는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지루함이 바닥을 치는 순간 뜬금없는 취미가 생겼다. 우리 집에는 식물 화분이 많은데 나는 도통 식물에 관심이 없었다. 화분에 물 주는 것도 동생이 전담했고, 동생이 장기 출장이라도 떠나면 식물들은 전부 말라죽을 정도였다. 그런데 요 근래 식물들이 자라는 게 돋보기를 댄 것처럼 갑자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녀석은 어제보다 5미리 정도 키가 컸네. 이 녀석은 새 순이 돋기 시작했네 하면서. 심지어 잎을 만져보고 수분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부산스럽게 확인도 해보았다(나도 이런 모습이 매우 매우 낯설다).


집에서는 모든 것이 정적이지만 (텔레비전을 제외하면) 식물만이 동적으로 살아 움직인다. 심지어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말이다. 퇴직한 부모세대가 어떤 과정으로 식물 가꾸기에 심취하는지 몸소 체험해보고 있다. 조금 더 지루해지면 난 마당에서 개미의 생활을 관찰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물론 자연을 관찰하는 (돈 안 드는) 취미도 좋지만,

(돈 드는) 취미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내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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