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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 Aug 15. 2022

단단한 손 끝

언제쯤이면 마음도 손가락도 단단해질 수 있을까

 아마도 내 일상에서 가장 평온한 날들을 지내고 있는 것 같다. 일도, 사랑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니 조금씩 되돌아보지 못했던 나의 몸과 마음을 보살펴주고 있다. 최근 뼈마디가 좀처럼 쑤시고 허리가 아파 난생처음 개인 PT를 등록했다. 팔과 다리가 길고 손은 몹시 큰 편인 나를 처음 마주하면 PT선생님, 피아노 선생님 할 것 없이 "정말 길다"라는 말을 일삼는다. 어렸을 때엔 나의 긴 팔다리, 큰 손이 단점보단 장점이 크다고 생각했다. 길다는 정도가 어느 정도냐하면 한 폭을 걸을 때 나는 두 폭을 걸을 수 있고, 피아노를 칠 때에는 최대한 벌리면 10도는 잡을 수 있다. (10도는 도에서 다음 옥타브 미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나의 큰 손이 남들보다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좋은 신체적 조건이 운동할 때, 피아노를 칠 때 십분 발휘되는지 깊이 고민해본다면 그렇지 않은 편에 가깝다.


PT는 하지만 소주는 마시는 아이러니한 상황. 생각보다 소주 안주에 클래식이 잘 어울린다는 사실까지. 


 나의 긴 손가락은 단단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손가락이 길어서 손끝까지 힘이 도달하진 않는 것인지 의심해본다. 선생님도 손가락이 너무 길어서 손 모양을 바로 잡는 것이 힘들 것 같긴 하지만 그건 모양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습관 때문이라고 정확히 수정해주셨다. 긴 손가락 때문이 아니라 결국은 잘못된 내 습관 때문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싫었나 보다. 시간이 지나며 취향도 변하듯, 손 모양도 변한다고 한다. 건반을 치는 습관, 올바른 손 모양을 가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계속해서 연습하다 보면 바뀌겠지.

 유독 하농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는 지금, 단단한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본다. 언젠가 친구들과 소주 한 잔 하며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흔들리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늦은 새벽까지 토론한 적이 있다. 조금은 소름 돋게도 서로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이야기했지만 고민의 끝은 같았다. 고민을 이야기하곤 싶지만,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이미 정해져 있단 사실을 깨닫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한참을 소리 내지 않고 웃었던 적이 있다. 답정너의 마음이 단단한 마음이라고는 치부할 수 없겠으나 내 안의 올곧은 기준을 갖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예전에 찍어놓은 하농 연습법. 이렇게 손가락 힘을 기르는 데 집중하라고 떡하니 쓰여있건만!

 하농을 치며 내 손가락이 단단한 소리를 낼 수 있는 타건지점을 습득하고자 힘쓰지만 여전히 목과 승모근에 너무 많은 힘이 들어간다. 팔은 힘을 빼고 빠진 모든 힘을 손 끝으로 모으는 작업이 이리도 힘든 과정일지 몰랐다. 이 과정을 모두 무시한 채 빠른 연주에만 몰두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한 음, 한 음 피아노 건반을 치면서 닿는 내 손가락 끝의 감촉과 어떻게 해야 소리가 나는 지 집중하면서 연습하고 있다. 음들이 단단하지 않으니 처음엔 어느 정도 완성되는 것 같지만 점점 속도를 올릴수록 음은 듬성듬성 빠지는 것이다. 이 사태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나와 선생님은 다시 에튀드 처음 연습했던 때로 돌아가 왼손, 오른손 개별연습을 사과 10개 그려놓고 하나씩 지워나가기로 약속한다. 단단해진 음에 속도가 붙어야 아름다운 연주가 될 수 있으니. 

 내 언젠가, 식당이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에 갔을 때 어디 누구 피아노 치시는 분이 없으신가요?라고 식당 주인이 말을 꺼낸다면 용기 내어 손을 들고 쑥스럽게 나가 피아노 앞에 앉고 싶다.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쇼팽 에튀드 혁명을 칠 때 치는 나도, 그 연주를 듣는 식당 손님들도 최고의 저녁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 순간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지만 언젠가 내 손가락 끝도, 내 마음도 흔들리지 않고 제 소리는 낼 수 있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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