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속 세상 들여다보기
워낙 추위를 잘 타는 나의 몸은 패딩을 부르고 있지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3월, 봄, 창을 통해 바라본 햇살과 사람들의 얇아진 옷차림을 보니, 나를 고집하지 않고(아직 젊은 걸로), 거리의 모르는 사람들에게 맞춰 얇은 코트를 꺼내 입었다. 미세한 변화도 놓치지 않고 사진으로 남겨 놓는 지인을 만났다. 펌이 너무 잘 됐다면서 바람이 매섭게 부는 날, 길가에 서서 등을 돌리게 하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 언니, 그러고 보니 제 뒷모습을 본 적이 없네요!" 하며 사진을 달라고 했다. 펌을 할 때면(일 년 한 번) 거울에 비춰주는 뒷모습을 곁눈질로 대충 보았기에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뒷모습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음... 나의 앞모습은 늘 봐서 아는데, 뒷모습은 정말 모르겠구나.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더라도 나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지 못하는구나'하면서.
뒷모습은 몰라도 앞모습은 잘 안다고 생각했다. 타인보다 내 얼굴을 보는 횟수야 적지만 말이다. 나를 안 다는 것은 곧 내면에 관한 이야기로만 받아들였다. 그런 중 <얼굴을 그리다>를 만났다. '내가 나를 가장 모른다'를 앞세운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이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마주 보고 대화하는 상대의 얼굴에 묻는 겨는 바로 보고 말해주지만, 내 얼굴에 묻은 똥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누가 말해 주거나, 나의 감각으로 어디쯤 묻었을 거라 느낄 뿐이다.
보이는 대로 진실되게, 있는 그대로 가장 똑같이 그린 그림이 제일 잘 그린 그림으로 친다면 굳이 비싼 돈을 주고 초상 화가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진을 찍을 때 각도와 얼굴의 좌우를 따지고, 두 달에 한 번씩 머리 염색을 하고, 큰 눈과 보쌰시한 피부를 주는 사진 성형을 해주는 앱이 계속 생겨나고, 성형외과 의사들이 돈을 어마하게 버는 것을 보면, 진실의 얼굴을 벽에 걸거나 보관하고 싶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미세한 주름 하나까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힘겨워한 작가의 할머니, 또 초상화를 본 후 자신의 진짜 현실을 자각하고 검버섯을 바로 없애 버린 할아버지. 이와 반대로 너무 미화해서 그리면 내가 아닌 모습에 낯설고,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할 상상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지도.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사람의 내면을 집중해서 깊이 보려 하고, 관찰하며 초상화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 작가의 성장담을 초상화 신변잡기 잡담으로 낯설고도 편안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체 보정'을 완료한 프로필 사진이 최고의 자료라고 하는데, 내가 초상화를 의뢰한다면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여주고 싶은지'를 어떤 방식으로 찾아낼지 궁금하다. 가족사진에서는 늘(거진) 내가 없고, 셀카도 찍지 않는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파헤칠지. 의뢰인인 나를 알기 위한 시도가 있다면, 나는 상담받는 기분이 들 것 같고, 초상화가 그려지는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되는 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무리 좋은 보정 앱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큼큼 그만큼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큰 것일까? 그 격차를 좁히지 못해서 낯설고, 남들의 시선을 (아직도) 의식하고 있다. 또 반대로 내가 다른 이의 셀카를 볼 때도 같은 생각으로 보는 것일지도. 역시 우리 조상님의 피가 몸 어디를 돌고 있는 게 맞다. 얼굴에 감추고 싶은 부분 사마귀, 천연두 자국, 백반증까지도 사실적으로 그린, 타인의 시선에 서 자유롭지 못했던 조상들.
'뒤러'가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진취적인 포부와 긍정적인 자의식을 표현한 반면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가장 어두운 내면을 그렸고. 시대적으로 화가들의 건강한 자의식을 갖기 힘들어 자화상이 많지 않은 조선시대 '표암 강세황'은 자신을 그린 그림이 4점이나 된다. 죽을 때까지 나를 바로 볼 수 없고, 알기 힘들다는 '나'를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타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원하는 바를 듣고 그리는 초상화와 달리, '나'를 스스로 그린다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페르소나를 보여줄 것인지. 여러 페르소나 중심에 자아가 있다는 말로 여겨진다. 그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
헨리 어빙의 초상화와 흉상에 대한 다른 만족도, 윈스턴 처칠을 시대가 원하는 상을 그려 성공한 작가, 또 처칠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화가 고집대로 그려진 결과 처참하게 불속으로 들어간 초상화, 카메라가 없던 시절 신부의 초상화와 다른 얼굴을 마주한 헨리 8세 이야기 등은 아이 앞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가득 머금는 미소를 가진 페르소나를 위해 기억하고 싶다.
지폐를 사회의 자화상이라고 하는 부분 또한 앞으로 더 관심 있게 볼 것 같다. 코로나19 이전 여행을 했던 삶이 온다면, 외국을 갈 때 꼭 그 나라 지폐를 밥 먹고, 체험하는 데만 쓰지 말고, 아이와 함께 그 나라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어떤 억압으로 이 인물이 이 나라 사람들의 주머니 속에서 폭력을 행사하는지를 궁금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이순신이 '정부 표준 영정'으로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렸다는 사실에 상상을 어려워하는 나에게 나쁘진 않은데, 이런 영정 안에 작가의 모습이 있고, 작가가 지지하는 정치인의 모습이 있다는 것에는 크게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는 나름 상상을 하면서 만나야겠다.
처음 가는 모임에 '자기소개'내지는 '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마도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다고 했던 것 같은데. 도대체 누구에게 긍정을 뿌리겠다는 건지. 아무 말 대잔치였다. 바라는 페르소나였지만 내가 없었고, 여러모로 나에게 그런 (긍정의) 줄기들이 없었다. 가식의 페르소나가 아닌 '나'라는 뿌리를 두고 이 가지, 저 가지에서 분홍 꽃, 노란 꽃 피워보고 싶다. 정중원 작가는 초상화를 통해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았다. 책을 읽으며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고, 고통스러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찾아도 좋고, 사람 만나는 것이 좋다면 대화 속에서 나를 발견하거나, 내 몸의 한계점까지 다다를 숨찬 운동 속에서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