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걸고 '사람 길'을 기는 지렁이
비가 오면 지렁이는 땅 밖으로 기어 나온다. 땅에 스며든 비가 흙 알갱이 사이를 가득 메우면 피부로 호흡하는 지렁이가 숨 쉴 공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비가 좋아서 나오는 게 아니라 살려고 나오는 거다. 숨쉬기 위해서.
구멍마다 들이닥치는 빗물을 거스르며 힘겹게 땅 위로 올라온 지렁이는 안전한 곳을 찾아 이동한다. 이내 비가 그치고 태양이 얼굴을 드러낸다. 큰일이다. 해가 점점 하늘 가운데로 올라올수록 지렁이의 마음이 다급해진다. 숨쉴 수 있을 만큼 적당히 촉촉하고 그늘진 땅을 만나면 좋겠는데, 인간이 딱딱한 돌로 만든 이 길은 끝날 줄을 모른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지친 지렁이는 점차 느려지고, 바깥 피부부터 조금씩 말라 뻣뻣해지기 시작한다. 몸이 둔해짐을 느낀다. 탈 듯한 따가움과 숨 막히는 고통에 몸을 꿈틀대다 결국 지렁이는 움직임을 멈춘다. 그의 몸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 수분기 없이 납작하게 말라간다.
땅 위에 죽은 지렁이들이 부쩍 많이 보인다. 지난해보다도 그 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무슨 연유일까. 지렁이는 긴 몸을 쭉쭉 늘였다 당기며 일자로 앞으로 나아가는데, 그와 반대로 그들의 죽은 몸은 항상 기괴하게 뒤틀려 있다. 저 여리고 작은 몸으로 죽어가는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죽은 그들을 보면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 지나갈 수 없어 나는 자꾸만 걸음을 멈춘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생물들의 삶의 터전을 침범해 왔다. 우리가 편하게 걷고자 땅을 빈틈없이 다지고, 끈적한 석유의 잔유물로 그 위를 덮는다. 원래 그 땅속에 살던 곤충들은 하루아침에 하늘을 잃는다. 땅 위로 올라오려던 그들은 딱딱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벽을 마주한다. 가도 가도 끝을 찾을 수 없는 폐쇄의 공포. 그곳에서 절망을 딛고 살아갈 수 있을까.
땅이 아스팔트와 돌로 덮이기 전, 아주 오래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길을 떠날 때 두 종류의 짚신을 챙겼다. '오합혜'와 '십합혜'. 오합혜는 짚 다섯 가닥을 꼬아 성글게 짜고, 십합혜는 열 가닥의 짚으로 촘촘하게 짠 신이다. 십합혜가 튼튼하고 오래가지만 산길에 접어들면 오합혜로 갈아 신었다. 듬성듬성 짠 짚신 아래에서 벌레들은 깔려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합혜는 성글기에 그만큼 수명이 짧은데, 그럼에도 작은 생물들을 함부로 밟지 않기 위해 우리 선조들은 기꺼이 불편을 감수했다.
발에 밟혔거나 자전거 바퀴에 깔렸거나 어쨌든 몸통이 끊겨 납작하게 죽어 있는 지렁이를 볼 때면 십합혜와 오합혜가 떠오른다. 우리는 옛날의 우리만큼 작은 생물들에게 관대하지 않다. 꿈틀대는 지렁이를 발견하면 으악 소리가 먼저 나온다. 우리의 신발은 이제 땅바닥과 완전히 밀착하여 그 사이에는 생명을 위한 여지나 틈이 없다. 튼튼한 신발은 우리의 발을 보호해 주지만 발아래 작은 생명들은 보호하지 않는다.
오합혜와 그걸 신고 흙길을 걷는 발을 생각하며 사람 길 위의 지렁이들을 흙으로 옮긴다. 나뭇가지를 몸통 밑에 밀어 넣을 때마다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펄떡이는 지렁이를 볼 때면, 그를 옮기는 것과 그대로 두는 것 중 어떤 게 더 그를 위한 선택인 걸까 고민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사람 다니는 길 위에서는 흙 위를 길 때보다 지렁이의 명이 줄어들 확률이 높다는 거다. 딱딱하고 마른 땅이라도 흙이 낫고 그늘이 낫겠지 싶어 기어코 지렁이를 옮기고 만다. 여유가 있으면 흙을 파 조금 더 촉촉한 구덩이에 넣어주고, 물을 갖고 있는 날이면 텀블러에 담긴 물을 그에게 조금 나눠주기도 한다. 아스팔트와 돌로 덮인 길을 편하게 걷고 있는 인간으로서, 공용의 공간을 점유한 거대 생명체로써 이렇게나마 죄책감을 덜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