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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라 오드리 Jul 28. 2021

아버지는 피아노가 싫다고 하셨지

부르크뮐러 피아노 연습곡 순진한 마음의 멜로디가 아침부터 흘러나온다. 양 손을 치기에는 버거운지 띄엄띄엄 멜로디를 맞춰가며 나름 애를 쓰고 있다. 눈 뜨자마자 건반을 두드리고 있는 둘째다. 이제 곧 진짜 열 살이 되는 둘째는 4년째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그렇게 넓은 평수도 아닌데 집 한구석에 오래된 피아노가 놓여있다. 내가 꼭 둘째 나이에 우리 집에 왔으니 어림잡아도 삼십 년은 넘었다. 자취 생활을 하면서도 피아노만은 못 버리고 이고 지고 다녔다. 그럼 내가 피아노를 무척 잘 치는 수준급 연주자라 생각되겠지만 아니다. 고작 바이엘 정도 쳐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엄마, 나 피아노 배우고 싶어~!” 하고 말하니 엄마가 말씀하셨다.

 “응?”

 “혜진이가 학교 끝나고 저 아랫마을 시장통 입구에 피아노 간데. 나도 다니면 안 될까?”

“아빠랑 한 번 이야기해 보자.”

역시나 엄마가 한 번에 허락하실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저녁에 아빠가 오셨다.

 엄마가 피아노 이야기를 꺼내니

“피아노는 무슨. 주산시켜. 피아노보다 주산이 훨씬 좋아. 기왕 가르칠 거 남는 걸로 시키라고”

아빠한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공부였다. 지금도 단 한 번도 우리한테 공부하란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지만 우린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길이란 공부라는 걸.     


하얀색에 피아노 건반이 그려진 가방 대신 노란색에 주판이 그려진 가방을 들고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얼마 후 동생이 누나랑 같이 주산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하자 난 아빠 말 듣고 주산을 배웠으니까 동생만은 피아노를 가르쳐달라고 사정했다. 그리고 우린 다른 가방을 들고 같은 방향으로 한참을 걸어 마주 보고 있는 학원에 나는 주산을, 동생은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다. 


억울했지만 피아노는 동생에게 기회를 넘겼다. 그것도 남동생. 이유도 모른 채 누나가 권했으니 열심히 다녔고 유난히 희고 긴 손가락으로 가끔 나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주었다. 당시 TV도 없었던 우리 집에 피아노를 들여주신 걸 보면 아버지의 교육에 대한 욕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 집은 소위 있는 집이 되었고 그 피아노는 지금 칠 줄 모르는 내 집 한편에 모셔져 있다. 동생은 피아노 치는 방법을 배웠으니 피아노는 내가 가져야 그나마 좀 덜 서운할 것 같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이들을 통해 대리 만족하고 싶었던가보다. 다행히 남편이 아이들은 꼭 피아노를 배웠으면 했고 우린 과감히 조기 피아노 교육을 결심했다.


그렇게 첫째는 이유도 모른 채 나와 함께 5살 때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다. 다행히 진도를 곧 잘 따라갔지만 너무 신경을 곤두세웠는지 나는 몸살에 걸렸고 첫째는 점점 피아노를 멀리했다. 결국 호기롭게 시작한 피아노는 석 달만에 막을 내렸다. 


대신에 다양한 공연장과 미술관에 열심히 데리고 다녔다. 듣는 귀, 보는 눈이라도 좀 생기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아직 어리니까 무료 공연과 숲 속 음악회, 페스티벌, 시립미술관을 주로 찾았다. 멋모르고 시작한 문화 여행이었는데 대중적인 공연이다 보니 쉽고 귀에 익은 클래식 음악과 오페라 주요 노래 등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오페라 리골레토의 여자의 마음은 정말 어딜 가나 듣는 인기곡이었다. 집에 오면 다시 그 음악을 찾아 듣고 피아노로 연주해보며 연습도 하는 아이들이 기특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지만 복병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바로 층간소음. 윗 층에 사시는 어르신은 평소 우리 아이들을 너무나 예뻐하셨는데 갑자기 내려오셔서 당장 피아노를 치워달라고 호통을 치셨다. 남편은 남과 문제가 생기는 걸 죽기보다 싫은 사람이라서 우린 그날로 전자피아노를 알아보고 그렇게 나와 함께 했던 피아노는 중고상에 넘기고 말았다. 갈색에 오랫동안 손때 묻은 피아노를 보내며 아쉬움이 컸지만 아이들이 피아노를 즐기며 아니 음악을 즐기며 힘들 때마다 위안받는 걸 보니 한편으로는 위안도 됐다. 


아버지는 피아노가 싫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말씀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피아노가 너무 좋지만 우리 형편에 그건 어렵겠구나 였던 것 같다. 아버지는 흥이 좋은 분이셨다. 술이 한 잔 들어가면 송창식 씨가 부르던 담배가게 아저씨를 한 소절 뽑으시고 어머니께는 시를 적어 연애편지를 보내시던 감성이 풍부한 분이셨다. 직접 써 내려간 두툼한 시집을 보면서 아버지의 구슬프고 외로운 청춘이 한없이 가여웠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그 옛날 그 감성을 가지고 힘든 세월을 버티기란 쉽지 않으셨겠지. 그 흥이 대를 걸쳐 아이들에게서 내비치는 건 아닌가 싶다. 이 또한 아버지의 선물 이리라 생각하니 오래된 피아노를 보낸 게 죄송한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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