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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라 오드리 Aug 10. 2021

다시 태어난 너를 환영해

[유원]를 읽고

그날 이후, 이전에 나를 몰랐던 사람들조차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나를 위로하고 축복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웃을 때면 생전 처음 보는 풍경처럼 낯설어하고 약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행복을 바랐다면서도 막상 멀쩡한 나를 볼 때면 워낙 뜻밖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듯 당황했다. 

- 백온유 장편소설 [유원]


잊지 않고 방문하는 블로그가 있다. 책을 좋아하는 그의 선택은 믿음이 갔다. 그녀가 읽는 책은 나도 읽고 싶었고 공유하고 싶었다. 온전히 그와 같은 생각을 할 수도, 느낄 수도 없지만 그래도 같은 책을 읽었다는 동질감이 좋았다. 


이번에 포스팅 한 책은 나도 즐겨 읽는 청소년 소설이었다. 나는 성인소설보다는 훨씬 공감하기도 쉽고 어려운 낱말도 없는 청소년 소설이 좋았다. 아직 철이 덜 들어서인지 몰라도 등장인물의 생각을 쉽게 읽고 짐작할 수 있었고 그들의 고뇌가 좋았다. 내가 못다 한 방황과 갈등을 지금이라도 그들로 인해 대신 채워지는 것 같아 내가 완전한 성인이 될 것 만 같았다. 


유원은 불길 속에 살아남은 유일한 아이였다. 유원 대신 십 대인 언니는 아까운 죽음을 택했고 화재의 원인은 어이없게도 위층에서 떨어진 담뱃불이었다. 그리고 유원이 살아남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결점 많은 이웃 아저씨였다. 세상에 내세울 건 자신이 떨어진 아이를 받느라 한쪽 다리가 못쓰게 되었다는 것. 덕분에 유원과 가족들은 평생 달갑지 않은 손님으로 아저씨를 맞이해야 했다. 


자신의 속내를 제대로 다 드러내지 못하는 유원의 삶은 어찌 보면 반쪽짜리 삶이었다. 나를 나라고 말 못 하고 모든 이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껍데기의 삶은 어떠했을까? 하지만 소설책 속에만 존재하는 인물은 아니다. 우리 집 둘째는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고작 열 살밖에 안 되는 그 녀석은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제 언니가 조금만 불편한 기색을 보여도 미안하고 지나가다 작은 실수를 범했다면 그보다 더 미안한 일은 없다는 듯이 사과를 한다. 그 사과란 것이 나오는데 1초도 걸리지 않은 걸 보면 몸에 밴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사과하는 건 과연 본인의 뜻일까? 아니면 사회 안에 만들어진 것일까? 아마 후자이지 않을까 싶다.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언니한테도 엄마한테도 잘 보여야 할 테니 누구든 밉보이지 않고 싶었을 테고 자연스레 본인 때문에 거슬렸다 싶으면 바로 미안하다는 말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가끔 자신도 모르게 나온 사과 덕분에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본인은 괜찮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반면에 2년 더 산 큰 놈은 어지간해서는 사과를 하지 않는다. 이제 어느 정도 논리가 세워진 이상 납득할 수 없는 이유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녀석에게 사과를 받는 일은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한 참 예민한 사춘기. 웬만큼 입씨름을 하지 않고서는 정중한 사과를 받기가 쉽지 않고 정작 받는다 해도 너무 지쳐서 마음은 마음대로 상하고 몸은 몸데로 지치고 만다. 그래서 가급적 부딪히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는 게 상책이다. 



이 두 녀석이 태어났을 때부터 이렇게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온유가 베란다에서 떨어지기 전에는 남 눈치 안 보고 소리를 있는 데로 지르며 미끄럼틀을 타는 아이였던 것처럼.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것이 틀렸다고도 할 수 없고 옳다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너무 늦기 전에 나라는 하나의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목소리는 낼 수 있어야 한다. 너무 강하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게. 결국 그 정도와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것은 가정이라는 첫 사회일 것이다. 


온유의 부모님은 주변이 시선으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딸에게 거친 말을 내뱉지 못한다. 자식이 짊어진 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나눠질 수 없으니 그나마 더해주지는 않겠다는 마음이겠지. 먼저 간 언니의 삶,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님의 삶, 그리고 화재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몫까지 살아내려는 어린아이.


그리고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자신의 기질과 가족 구성원의 기질로 서로 부딪혀가며 살아가는 아이. 부모에 의해 어떤 한 인격체로 마무리될 그 아이들이 나로 인해 어떤 사람으로 자라 사회 구성원으로 역할을 할지 두려울 때가 있다. 여기서 아이에게 독이 되거나 버팀목이 될 한 가지를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믿음을 선택하고 싶다. 온유도 내 울 안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부모의 믿음은 분명 주체적인 삶의 이정표가 된다. 온유가 더 높은 곳을 향해 내딛을 때 그것이 가능한 건 바로 부모의 믿음이었다. 아늑하게 돌아갈 수 있는 자리. 비록 이 책에서 어른들의 잘 살 거야, 꼭 잘 살아남아야해 라는 바람으로 바스러질 듯한 삶을 산다 해도 결국 정상에서 더 높은 곳을 향해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것은 믿음이었다.


아이들을 만날 때 내가 마음속으로 다시 되뇌는 것도 믿음이다. 너희들이 잘해줄 거라 믿어. 분명 잘할 거야. 부담이 되어 한 번쯤 넘어진다 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는 나를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분명 나를 향한 믿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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