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나라 오드리 Aug 27. 2021

연필에 스민 온기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며

"엄마, 연필깎이가 안 보여요!"

말인즉 엄마 연필 좀 깎아주세요. 분명 책상에 있어야 할 은빛 기차는 식탁에서 갈 곳을 잃었다. 쯧


아버지는 아무리 늦은 퇴근이시더라도 꼭 해주시는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내 필통에 연필을 가지런히 깎아 넣어주시는 일이었다. 학용품을 넉넉히 쓸 수 있는 우리 집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연필깎이 하나는 사주실 수 있으셨을 텐데 꼭 손수 연필을 깎아주셨다. 


바닥에 넉넉히 신문지를 깎고 칼을 조금 길게 잡아 한 자루를 왼손에 쥐고 오른손에 살며시 칼을 밀어내는 행위는 어찌 보면 신성해 보이기도 했다. 심이 너무 길어서도 안되고 나무가 너무 길어서도 안된다. 어느 한쪽이 움푹 패어 균형 잡히지 않은 연필은 더욱 볼 품이 없었다. 적당히 나무를 베어내고 흑심이 나오면 이제 뭉툭한 끝을 날카롭게 다듬는다. 여기서 힘 조절에 실패하면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된다. 끝은 너무 뾰족해서도 안된다. 위험하니까. 그렇게 5자루를 가지런히 필통에 넣어주시면 아버지의 일과는 끝이 난다. 


아버지는 못 만드는 게 없으셨다. 겨울에 특히 그 손재주가 발휘되었는데 아버지가 만든 연은 단연코 최고였다. 정확히 재단해서 균형을 잡고 실로 잘 매듭진 연은 잘 날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유난히 공을 들인 건 다름 아닌 얼레다. 좋은 나무를 골라 잘 말려서 다듬은 후 여섯 개의 짝을 잘 맞추고 가운데에 자루를 박는다. 여섯 개의 나무기둥은 적당히 서로를 마주 보고 자루는 가운데에서 중심을 잘 잡아줘야 한다. 구멍을 뚫을 때는 어찌하셨는지 하얀 나무 가운데에 까맣게 탄 흔적도 남아있었다. 겨울이면 방에서 얼레와 연을 만드시느라 꼬박 밤을 새우셨고 주말이면 코끝이 얼얼할 때까지 연을 날리고는 했다. 아버지가 만드신 방패연과 가오리연은 그 어떤 무늬도 없는 새하얀 고운 연이었다. 그러나 연을 날리는 실력은 볼품없었다. 그래서 운동장을 열심히 뛰어다닌 기억이 더 많이 난다.


판자를 엮어 만든 썰매도 만들어주셨다. 적당히 두꺼운 판자를 이어 붙이고 바닥에는 철사를 잇대어 마무리한다. 그리고 폴대 끝에 못을 박아 얼음에 잘 미끄러질 수 있도록 했다. 아버지가 다듬은 나무는 아름다웠다. 어느 곳 하나 뾰족이 솟지 않고 부드러웠으며 짝이 잘 맞았다.


우리가 주로 이용한 논은 적당히 얼음이 잘 얼었고 그늘지지 않아 그렇게 춥지 않았다. 동생과 함께 썰매를 이고 논에 나가면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은 연필깎이다. 어느 날 문방구 앞에 진열된 은색의 빛나는 기차가 내 눈에 쏙 들어왔다. 그때부터 난 오매불망 그 기차만을 생각했고 매일 밤마다 일기장에 선물 목록 1호로 연필깎이를 썼던 것 같다. 그러나 내 머리맡에 놓인 선물은 분홍색 작은 연필깎이였다. 아마 그 당시 그 걸 사기에는 너무 부담이 크셨겠지. 그 뒤로 아버지가 연필 깎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어쩌면 많이 서운하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자식사랑을 표현하고 싶으셨겠지. 왜 몰랐을까? 어느 것 하나 다름없이 똑같이 깎인 연필이 내 눈에는 예뻐 보였겠지만 누군가는 아빠가 손수 깎아주는 내 연필이 부러움의 대상이었을지도. 


오랜만에 아이의 연필을 깎아본다. 

"엄마, 연필 잘 깎아?"

"그럼~ 엄마 연필 잘 깎아. 봐~ 진짜 잘 깎지?"



삶에서, 의미란 순간적인 것이 아니다.

의미는 관계를 짓는 과정에서 발견된다. 

-존 버거


Pixabay로부터 입수된 Free-Photos님의 이미지 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듣고 싶은 소리가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