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일상의 자유를 송두리째 빼앗겼을 때 느꼈던 상실감과 우울감을 한 방에 해결해준 건 다름 아닌 산이었다. 늘 그랬듯이 같은 자리에서 4번의 계절을 준비하며 부지런히 제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인간은 그 어떤 재앙도 모두 물리칠 것 만 같았지만 고작 바이러스라는 작은 생명체에 자리를 내주고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힘겨운 삶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패션업계는 두 계절을 앞서 간다는데 숲도 미리 계절을 준비한다.
봄을 알리는 새싹은 하얗게 쌓인 눈 속에서도 어김없이 땅을 뚫고 나오고, 예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나면 어느덧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고 여름을 알린다. 여름이 깊어갈수록 매미소리도 점점 거세지고 그 매미소리와 함께 하나 둘 낙엽이 지기 시작한다. 그럼 입추와 함께 내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가 있다. 바로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는 소리다. 고요한 숲을 걷고 있으면 여기저기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바삐 움직일 송충이와 애벌레들이 그려진다. 또한 그 속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감잎이며 상수리 잎이 남아나지 않는다.
어쩌다 몸이 너무 무거워 땅으로 떨어진 벌레들은 다시 나무를 찾아 급히 움직인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유연하고 빠른지 눈을 의심할 정도다. 하지만 내가 걷는 길에는 이렇게 열심히 몸을 키운 생명들이 무참히 밟힌 흔적이 너무 많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말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니 둘째 녀석이 한 발도 제대로 내딛지 못하고 제자리에 얼음이다. 너무 징그러워서 한 발짝도 걷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아이를 앞세워 아무렇지 않다며 1시간을 걸었다. 무지한 부모였으니 운동화를 신었지만 발끝으로 전해지는 그 느낌이 싫었을 것이다. 매미 시체만 봐도 너무 싫어 학원 가는 길을 빙 돌아다니는 아이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인간의 발끝에 허무하게 죽어가는 곤충이 불쌍하다고 말만 했다. 무심코 내 발끝에서 죽어간 작은 이들도 있을 텐데. 아이는 그게 두려워 섣불리 내딛지 못하고 내내 땅만 바라보고 걸었을 그 마음을 나는 읽지 못했다.
드디어 입추가 지나고 낙엽이 하나 둘 떨어졌다. 이제 사각사각 소리가 들릴 법 한데 이른 새벽을 아무리 걷고 기다려도 듣고 싶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벌써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건만. 바닥을 보며 걸어도 몸이 통통한 초록빛의 애벌레를 찾기가 힘들다. 게다가 송충이는 더 찾기 어렵다. 지난주 가까스로 검지만 한 애벌레를 구출해 숲으로 돌려줬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들리는 소식이 작년에 너무 심해서 올해는 일찌감치 항공 방제작업을 했다고 한다. 송충이는 해충이었던 것이다. 오직 솔잎만 갉아먹는 송충이는 번식력이 너무 강해 산 하나를 모두 죽이는 경우도 흔하다. 송충이 구제예방 규칙도 있는데 만일 송충이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 그 산의 소유자나 관리인이 송충이 구제예방 업무를 태만히 했을 경우 벌금이나 과료를 물 수 있다고 한다. 내 귀에는 즐거웠으나 숲을 해하는데 제일 문제가 된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해충과 익충을 구별하는 기준은 인간이다. 인간에게 해가 되는 곤충은 해충, 이익이 되는 건 익충. 얼마 전 뉴스에서 대벌레도 해충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적당히 번식을 해야 하는데 너무 많아 나무 한 그루를 뒤덮인 대벌레는 내 눈에도 탐탁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올 해는 대벌레도 많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송충이가 너무 많이 줄어든다면 먹이사슬은 괜찮을까? 과거에는 이 같은 현상이 극심하지 않았지만 어느 한 곳이 과한 경우가 자주 발생하는 건 선순환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원인은 무엇일까?
우리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듣고 싶은 소리는 올해도 약을 하나도 하지 않았을 어머니댁 감나무 밑에 가서 들어야겠다.
p.s.Pixabay로부터 입수된 Hong Eun Park님의 이미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