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지낸 이야기
때 묻지 않은 공기가 코끝을 살짝 스친다. 밤새워 뒤척이는 아이 때문에 깊이 잠을 자지 못했지만, 몸에 밴 듯 눈이 떠진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한 줄기 어슴푸레한 빛. 일어날까? 잠시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려 본다. 조금 더 잘까? 눈을 감았지만 눈앞에 떠오르는 예상되는 풍경이 나를 다시 일으킨다. 가보자. 이제 막 잠에서 깬 숲에 나도 함께하고 싶다. 비좁은 방에서 다 같이 자느라 방 안의 공기는 따스하고 온화했다. 하지만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숲의 공기는 가을이라 느낄 만큼 차가웠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조용히 기대되는 아이 발걸음을 옮겨본다. 매일 새벽 나서는 산책길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더 설렌다.
두 달 건너 한 번이면 방문했다. 친정. 나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청정지역으로 손꼽히는 관광지라 여름이면 피서객으로, 겨울이면 레저스포츠인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하지만 내 목적은 오직 내 집으로 여기까지 들어와 볼 생각도 못 했다. 방학 내내 집에만 머문 아이들과 매일 일에 치어 힘들었던 우리 부부에게 쉴 곳이 필요했는데 어쩌다 보니 덕유산 자연휴양림에 머물게 되었다.
출발할 때부터 날씨가 의뭉스럽더니 결국 장대비가 쏟아진다. 산이 높아 구름이 넘지 못한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 어디를 가나 터진다는 부채도 여긴 예외다. 아이들은 그래서 늘 불만이 많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족쇄가 풀린 듯 자유로웠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이른 잠을 청했는데 내 생각이라도 했는지 아니면 숲도 알아보는지 이른 새벽 비가 멈췄다.
답답한 공기를 뿌리치고 나오니 축축한 땅 내음을 가득 담은 숲 향기가 나를 감싼다. 비를 머금은 산길은 폭신했고 조롱조롱 이슬을 머금은 풀잎에 미소가 번진다. 이름 모를 야생화에 마음을 뺏기다가 하늘 높은지 모르고 솟아오른 가문비나무가 봐도 봐도 신기하다. 족히 150~200년이 걸린 숲이라니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고개가 숙어진다. 덕이 많아 덕유산, 덕이 있어 덕유산이라니 이번에는 숲을 위한 덕을 많이 쌓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휴양림은 1~2 정도의 산책코스를 마련해 놓았다. 어딜 가나 비슷한 구조인데 저마다 그 산의 특색 있는 숲을 하나씩 보물처럼 숨겨놓고 있다. 그 숲은 접근성이 그렇게 쉽지 않아 꼭 가봐야지 마음먹어야 한 번은 걸을 수 있었다. 독일가문비나무숲. 처음 듣는 나무이름이다. 원산지가 독일인가? 독일에서 유명한 가문비나무? 궁금했다. 호기심이 일었다. 지도를 챙겨 들고 나온 게 다행이다. 산책로 어귀 즈음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런데 그 입구가 쉽게 발이 들여지지가 않는다. 가시거리 1m. 날이 흐려서인지 더욱 어두워보였다. 잠시 날이 더 개기를 앞에서 기다렸지만 오늘은 구름이 더 힘이 세었나 보다. 간신히 한 사람이 지날 수 있는 좁은 통로가 내 마음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안 되겠다.
비밀을 간직한 숲이니 열쇠라도 하나 챙겨 와야지. 일단 후퇴다. 아직 산책로를 다 걷지 못했으니 남겨둬도 괜찮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유난히 인적이 드물다. 날씨 탓이겠지. 걸음을 옮겨 등산로로 향해본다. 어느 곳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욕심이 또 스멀스멀 올라온다.
비 갠 오후, 햇살이 좀 퍼졌다. 남편에게 살며시 아침 산책 이야기를 꺼냈다. 꼭 가고 싶었는데 혼자는 너무 겁이 났다고 그 숲이 궁금하다고. 그럼 같이 가볼까? 주섬주섬 마지못해 몸을 일으킨다. 앞서가며 살뜰히 살피는 듬직한 내 편이 고마웠다. 너무 좋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재잘거리는 내게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지만 내심 만족하는 듯해 마음이 놓인다.
숲 해설가가 함께였다면 참 좋겠지만 요즘 숲 해설은 큐알코드가 대신한다. 이도 신문물인데 카메라를 대면 큐알을 인식해서 동영상으로 숲 해설을 들을 수 있다. Norway spruce. 노르웨이를 비롯 유럽 전 지역에 퍼져있는 독일가문비나무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공교롭게도 일제 치하. 전역에 고루 퍼져 대관령을 비롯 여러 곳에 서식하고 있는데 이 곳 덕유산에 제일 많이 분포하고 있다. 그런데 노르웨이 가문비나무가 아니라 독일가문비나무란다. 그 당시 일본과 독일은 서로 우호관계였기에 일본이 독일가문비나무라 불렀고 그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이다. 나무 이름까지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걸 보니 더없이 씁쓸했다. 어찌하여 제 이름도 하나 지키지 못하고 남의 땅에서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다니. 지금이라도 이름을 다시 되찾아주고 싶은 마음이 솟는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적합한 구상나무로 정말 하늘 높이 솟아오른 숲이 꼭 유럽에 어느 마을에 와있는 기분이랄까? 하얗게 눈 덮인 겨울에 오면 숲 전체가 트리처럼 웅장한 느낌이겠다. 눈도 많이 오는 덕유산의 겨울에 한 껏 취해볼 생각을 하니 혼자 두둥실 마음이 설렌다.
비밀의 숲에서 찾은 야생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