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家族)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
ep1.
한낮의 졸음을 간신히 참으며 노트북과 씨름하던 중 정신이 바짝 나 게하는 전화가 왔다. 바로 둘째 담임선생님. 초등학교 두 아이를 키우는 내게 있어 제일 떨리는 전화는 바로 아이들 학교에서 걸려 온 전화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유명한 장난꾸러기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학교 전화는 늘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게다가 상담도 꺼리시는 둘째 담임선생님의 전화는 더욱 그랬다.
"어머니,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가족 동요 어울림 부르기 대회에 이랑이가 나가보면 어떨까 해서 연락드렸어요."
며칠 전에 가정통신문으로 가족 동요 부르기 대회 공지문이 왔었다. 아이에게 물으니 대뜸 싫어라길래 그냥 마음을 접었는데 선생님이 직접 전화를 주신 거다.
"네 선생님. 이랑이랑 이야기해볼게요."
다행히 선생님은 아이가 싫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며 전화를 끊으셨다.
두 딸에게 가장 큰 동기부여는 선생님의 관심과 칭찬. 인정이다. 마침 집에 돌아온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으니 선생님이 추천하셨다는 말씀에 신나게 "그래 좋아!" 하고 대답한다. 요 녀석. 그런데 문제는 가족 동요대회... 예선은 동영상 심사다. 동영상을 찍는 건 문제 되지 않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남편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이라 함은 아빠와 엄마 그리고 아이들인데... 나서기 좋아하지 않는 남편은 언제나 이런 일에는 열외였다.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고 반주는 일랑이가, 노래는 나와 이랑이가 하기로 하고 연습을 시작했다.
결혼과 동시에 내 삶의 모든 것은 아이들과 남편 위주로 돌아갔다. 틈틈이 공부하고 노력한 결과 도서관에서 강사로 일할 수 있었고 지금은 비대면 수업으로 거의 집에서 온라인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가장 큰 장점은 아이들을 모두 돌봐줄 수 있고 중간중간 집안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책으로 일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아이들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몸을 아끼지 않았고 정보수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다양한 전시회와 박물관 그리고 도서관 활동 프로그램 참여 등 정말 아이들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올해 일랑이는 지역 영재원에 주말마다 다니며 과학과 수학에 더욱 몰두하고 있고, 이랑이는 합창단 활동으로 자신의 꿈을 향해 한 걸음 내딛게 되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가족은 함께 기뻐하며 축하했다. 그러나 그 결과를 향한 과정에는 늘 나와 아이들뿐이었다.
ep2.
"이번 추석에는 어디로 가? 이번에는 꼭 필요한 것만 나눠서 딱 먹을 것만 싸가지고 가자."
명절마다 시댁 식구 모두 여행을 떠나는 내게 있어 제일 큰 부담은 식사 준비였다. 사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 식구들 덕에 9 식구의 3~4끼를 준비해서 직접 요리해 먹어야 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게 그런 건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여행에 있어 가장 큰 즐거움은 준비하는 과정이니 이 또한 여행의 연장이었고 열심히 준비해서 다 같이 즐겁게 먹는 것도 큰 행복이었다. 하지만 복병은 시어머니가 준비하는 음식의 양이었다. 어머니는 기본적으로 아이스박스 3개. 그래서 작년부터 메뉴를 각자 정하고 준비물을 나눴지만 아이스박스는 여전히 가득가득 차있었다.
식구도 많은데 많이 싸가서 맛있게 먹고 남으면 싸오면 되지.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날씨가 더운 요즘은 잘 상하기 쉽고 남은 음식을 치우는 것도 일이었다. 그래서 시작된 우리의 갈등은 점점 깊어갔고 내가 받는 스트레스도 쌓여갔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여행인지 가기 전부터 신경이 곤두서고 마음이 괴로웠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 일하는 중간중간 짬을 내 시장을 봤고 냉장고는 가득 찼다. 떠나기 전날 남편은 어머니와 통화하며 준비물을 점검했으나 역시... 어머니는 다른 메뉴를 준비하셨다.
"응 알았어 엄마. 다 가지고 갈게. "
그리고 내게 돌아온 대답은 "어쩌냐 네가 그냥 참아."였다.
출발 전부터 마음이 상했다. 내가 뭘까? 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내가 왜 이렇게까지 애를 써야 하는가?
ep3.
요즘 들어 부쩍 노트북의 속도가 느려져서 작업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렸다. 노트북이 밥줄인데 이게 안되면 정말 아무것도 못하는데... 불안한 마음에 오전부터 노트북 상태를 점검했다. 필요 없는 앱을 지우고 속도 체크를 하고 너튜브를 검색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노트북을 손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속도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고 게다가 뭘 잘못 지웠는지 ppt가 열리지 않았다. 으악! 마음이 급해지고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이제 수업까지 남은 시간은 단 2시간. 그 안에 일랑이도 데리고 와야 하는데... 다시 너튜브를 검색하고 다운을 받다가 급히 남편을 불렀다.
"여보 여기에 파일 깔려고 하는데 이 노트북 몇 비트지?"
"야 이런 건 네가 좀 알아서 하면 안 돼?"
...
그렇지 이런 건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데... 뭐든 내가 다 알아서 해야 할 것을 왜 불렀을까?
마음이 무너졌다.
일단 급한 데로 지인에게 문자를 보내고 차키를 들고 뛰어나갔다. 일랑이 수업이 벌써 끝났을 텐데... 서둘러 시동을 거는데 전화가 왔다.
"엄마 어디야?"
안 그러려고 했지만 눈을 꼭 감았지만 눈물이 났다.
이럴 때는 한 발 멀찌감치 떨어져서 내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게 내게는 도움이 되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나있니?"
나는 완벽한 가정을 꿈꿔왔다. 다정한 남편과 그냥 보기만 해도 예쁜 아이들. 어떤 일이든 함께 하는 가족.
그래서 밖에서 그렇게 나를 봐주기를 바랐다. 완. 벽. 한.
"어머니 이런 사람 없어요. 어떻게 사람이 완벽해요. 빈틈도 있어야죠. 애 아빠는 정말 살가운 사람이에요. 성실하고 자기 일 알아서 하고 걱정할 게 없어요. 잘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입버릇처럼 흘러나오는 이 말은 내게 거는 주문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과 살고 있어. 부족한 게 없지. 그러니까 더 열심히 살아야지. 부모님께도 더 잘하고 남편한테도 잘하고.
바깥 일하는 남편을 귀찮게 하지 않았고 친정도 아이들을 데리고 훌쩍 다녀왔다. 정말 차에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부탁하는 일이 없었다. 가끔 가족이란 이름이 필요할 때면
"남편이 주말에도 바빠서요. 오늘 출근했어요."라는 변명으로 대신하고
집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남편을 눈감아줬다. 아주 그럴싸한 이름 "배려"라는 명목으로.
그렇게 13년을 산 지금, 다시 생각해본다.
과연 그게 진짜 배려였을까?
정말 그 사람을 위한 일이었을까?
본인이 원할 때만 마음이 내키는 일에만 가족이 되어주는 아빠, 남편은 정말 우리 가족일까?
나는 누구에게 보호받고 있는가?
"아빠는 이런 일에 참여하는 거 원치 않아. 그냥 우리끼리 하자."로 내게 설득당한 아이들은 이제 아빠와 함께 하는 이벤트들이 불편해졌다.
묻고 싶다.
"당신은 정말 가족인가요? 어떤 가족으로 살고 싶은가요?"
이게 정말 당신이 바라던 가족이란 형태인가요?
배려라는 이름으로 남편의 무임승차를 허락한 나는 유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