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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라 오드리 Jun 27. 2021

가면무도회

내가 쓴 가면은 몇 개일까?

  언젠가 베네치아에 갔을 때였다. 안타깝게도 내가 도착한 날은 하필이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호기롭게 기차에서 내렸지만 도무지 숙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기차역에서 걸어서 20분 거리라고 했는데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걸어도 다시 또 걸어도 제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이건 뭐에 홀린 것도 아니고 점점 겁이 났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결국 배를 타고 건너기로 마음을 먹고 비싼 뱃 삭을 치르고 다리를 건넜다. 해 질 녘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이미 내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다시 한 참을 골목을 헤매고 날이 한 참 어두워져서야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여행을 좋아했던 나는 주말이면 혼자 또는 친구와 둘이서 정말 많은 곳을 여행했다.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다가 갑자기 결혼을 했고 누군가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주말이면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낯선 명찰을 가슴에 억지로 달아맸다.  거기까지는 할 만했다. 직장에서도 예의 바르고 일머리도 있어서 어디서든 환영받았고 성격도 적극적이고 활달해서 인기도 많았다. 하지만 내 화려한 가면으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닥쳤다. 바로 엄마.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다.  

  

  아침 6시. 따뜻한 밥과 국, 반찬으로 남편의 아침 상을 차리고 나면 다시 아이들 옆에서 잠시 눈을 부쳤다. 그리고 나의 두 번째 가면인 엄마 역할이 필요한 시간이 된다. 밥을 먹일 때는 따듯하고 온화한 엄마로 시작했다가 서서히 무서운 마귀할멈의 가면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식탁을 치우고 아이들과 놀이를 하며 세상에서 제일 웃긴 가면을 쓰고 아이들과 신나게 논다. 때로는 멋진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고 때로는 뽀미언니 목소리를 흉내 내 다양한 동요와 율동도 해본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가면을 바꿔가며 애를 써보지만 가끔 내 자리는 늘 제자리인 것만 같았다. 이제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자신의 일을 하나 둘 알아서 하지만 지금도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는 가장 친한 친구로, 수학 문제를 풀 때는 인내심 많은 선생님으로, 같은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토론자로 나의 역할은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가면을 쓴다고 하면 어쩌면 진실되지 못한, 자신을 감추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연상되지만 나에게 있어 가면은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재능을 바꿔 나를 사용하는 옷과도 같다.




  비를 맞으며 내가 헤맸던 그 골목은 다양한 가면을 만드는 장인의 거리였다. 간신히 한 사람이 지날 수 있는 좁은 골목을 마주한 상점에 내걸린 가면들은 등줄기가 서늘해질 만큼 섬뜩했다. 화려하지만 어딘가 아름답다기보다는 조소를 띄고 나를 비웃는 듯한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다음날 그리고 또 다음날 베네치아에서 묵는 일주일 동안 기념품을 사겠다고 다시 그 골목을 찾았지만 난 결국 찾지 못했다. 날이 훤히 밝은데도 어쩐지 그 골목만은 어둠이 걷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베네치아는 내게 좋은 이미지보다 서글프고 외로운 도시로 남아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난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에 서명을 했다. 그리고 그 7가지는 13년째 우리 집 냉장고에 붙어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약속은 지금 행복한 아이가 커서도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 약속을 지키려고 무던히 노력해왔다. 어느 날은 정말 그 아득한 골목 안에서 제자리를 빙빙 돌며 빠져나오지 못한 어둠을 걷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말도 안 되는 실수로 수치심에 온 몸을 떨기도 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진짜 내 모습을 들키기 싫어 가짜 가면을 쓰고 싶었던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짜 미소가 아닌 나를 숨기고 싶은 가짜 미소를 단 화려한 가면은 쓰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때그때 바꿔 쓰는 나의 가면들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엄마도, 아내도, 며느리도 모두 처음이기에 그때 내 모습들은 어쩔 수 없었다고 그게 최선이었다고 나를 위로해주고 싶다. 아직도 완벽하지 못하지만 어제보다 오늘은 좀 더 나은 나이기를 바라며 오늘도 애썼다고 따뜻하게 온몸으로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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