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나 쓰기
비행기와 택시를 번갈아 타고 호텔을 옮겨 다니며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는 동안,
글 쓰는 일은 매일 돌아갈 수 있는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가 되어주었다. 마치 나만의 집을 갖고 다니는
것처럼 위로가 되었다.
_재클린 윈스피아
혼자 떠난 파리행 비행기 안에서 책을 폈을 때,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딱히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무언가에 집중할 책도 없었다. 물론 가방 안에는 다양한 소일거리들이 있었지만 혼자라는 두 글자에 밀려 머릿속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히 쓸거리도 찾지 못했다. 그때 내가 선택한 건 그냥 지도를 보는 일이었다.
40일간의 일정을 다시 보고 또 보고, 도착해서 찾아가야 할 숙소의 지도를 또다시 보는 일이 전부였다. 그렇게 알 수 없는 거리를 한참을 헤매다가 반대쪽 빈 공간에 뭔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공항까지 나와 동행해준 엄마의 얼굴을
지난밤 잘 다녀오라며 조촐한 파티를 열어준 동료들의 얼굴을
첫 월급부터 두 개의 적금으로 나눠 꼬박꼬박 모았던 내 여행경비를
그리고 왕복항공권과 유레일패스를 예약하던 그날을 떠올리며 오늘을 기록했다.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선 그날의 그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았고 엄마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몄다. 슬프다. 죄송하다. 이런 단순한 단어로 내 마음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한 글자, 한 글자 적다 보니 어느새 한 페이지가 채워졌다. 그렇게 시작된 쓰기는 매일 밤 일기 쓰기로 이어졌다. 혼자 하는 여행이 내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기록이다. 하루 종일 거리를 걷다가 돌아온 밤은 매일 하루를 되짚어보는 일로 끝났다. 낯선 거리의 풍경과 내게 인상적으로 남겨졌던 순간들이 하나 둘 빈 페이지를 채워갔다. 때로는 낯선 인연들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약속을 하며 메일 주소와 연락처를 남겼다.
외롭지 않다.
어디에서나 쓰는 글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쉬웠다. 일정을 따로 맞추지 않아도 되고 내가 원하는 곳을 원하는 시기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단점은 바로 외로움이다. 혼자인 게 싫어서 늘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했지만 여행은 늘 혼자였다. 그 외로움을 글이 채워줬다. 책을 읽는 것보다 글을 쓰는 일이 훨씬 좋았다. 지금 돌아보니 사진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행지에서 쓴 글들은 보물처럼 책장에 꽂혀있다. 가끔 그날의 기억을 쫓아 글을 읽다 보면 난 다시 파리의 벤치에, 헝가리 어느 골목의 갤러리에 서있다.
무게를 알 수 없는 노트
첫 여행지에 내 등에 짊어진 배낭은 36kg이었다. 여름이었고 40일 일정이었으니 그나마 적은 양이었다.
어디서든 간단히 펴고 앉아 점심을 먹거나 햇살을 즐겼던 작은 패드는 지금 세탁기 덮게로 쓰이고 그때 즐겨 입었던 등산 바지도 올여름 매일 산을 다니며 입었다. 하지만 그중에 가장 소중한 건 바로 여행노트. 순간순간의 모든 기록이 담긴 노트는 무게도 가치도 숫자로 나타낼 수 없다. 외로움에 빗속을 걸었던 그날의 일기는 얼마나 무거울까? 어느 숙소에서 만난 친구들과 기울인 소주잔을 생각하며 써내려간 일기는 얼마나 가벼울까? 고개를 들어도 끝이 없이 뻗어가던 정원의 아름다움은...
홀로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글쓰기는 혼자여야 가능하다. 오롯이 홀로 앉아 펜과 종이를 친구 삼아 문자로 수를 놓는다. 그 어떤 이야기도 그려낼 준비가 되어있다. 내가 시작해서 내가 끝낼 그 이야기는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다. 누구의 평가도 필요 없다. 오로지 내가 나를 그려내기만 하면 된다. 왜 꼭 좋은 글이 여야 하는가? 좋은 글은 누구에게 좋은 글일까?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무조건 받아들일 가장 든든한 내 편이다.
문득 떠오른 멋진 문장을 남길 수 없는 순간만큼 아쉬울 때가 없다. 순간 녹음이라도 해놓고 싶지만 이미 내가 생각했을까 싶은 그 멋진 문장은 멀리 날아가버린 후였다. 어디에서나 쓰다 보면 언젠가 내가 원하는 그 순간에 가슴 벅차게 절절한 문장들이 떠오를까? 어디에서나 쓰다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