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에 관한 생각
"여보! 내가 라면 냄새 싫다고 했잖아! 그걸 못 참아?"
알콩달콩 싸움이란 없을 것 같은 남편과 첫 부부싸움은 라면 때문이었다.
임신 중 나는 절대 라면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왜? 글쎄 태아에게 가장 해로운 음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남편이 지켜야 할 금지 항목 중 1번은 집에서 라면을 먹지 않는 것이었다.
입덧도 하지 않았고 가리는 음식도 없었지만 라면만큼은 먹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다행히 딱히 즐겨 먹지도 않았으니 내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남편은 달랐다.
우리는 라면을 끓이는 방법부터가 너무 달랐다.
우선 두 개의 냄비에 물을 끓인 후 면을 한 번 삶아 찬 물에 헹궈 다시 끓인다. 수프는 반만 넣고 대신 미역과
마늘은 넉넉히 넣는다. 이렇게 끓이다 보면 면이 아주 부드럽게 익는다. 담백한 국물에 잘 삶아진 면 그리고 짜지 않은 간은 크게 부담되지 않았다. 남편은 절대 내가 끓인 라면을 먹지 않았다.
남편이 끓이는 라면은 뒷면에 적힌 레시피 그대로다. 물도 딱 정량 이어야 하고 면은 절대 불지 않은 탱글탱글한 면이어야만 한다. 라면을 물에 넣는 순간 알람을 켜는 건 아주 중요한 행위다. 라면의 고유한 맛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늘이나 파 이외에 어떤 첨가물도 허용하지 않는다. 계란을 넣는 라면은 따로 있다. 단! 짜장라면에는 해물이 넉넉히 들어간다.
아내가 임신 중이라고 집에서 라면을 먹으면 안 된다는 건 어차피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그나마 처음 1~2달은 참았지만 그 뒤로는 참기가 어려운지 라면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처음 라면을 끓여먹는다고 했을 때는 내가 아주 잘 참아낼 것만 같았다. 그래서 허락한 최초의 그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난 방에 들어가서 코를 막고 유난을 떨었다. 어느 정도 환기가 되었다 생각하고 나왔지만 아직도 진한 라면의 향기가 곳곳에 묻어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열 달 동안 라면을 참았지만 우리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라면이다. 해외여행을 갈 때도 라면은 챙기지 않았지만 돌아와서 첫 끼는 꼭 라면이었고 간혹 어떤 보상받을 일이 있다면 당연히 라면을 선택했다.
물론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라면은 아빠가 끓여주는 라면이다. 정확한 물의 양과 불의 세기, 시간을 맞춘 잊을 수 없는 맛의 라면. 엄마가 왜 그렇게 끓이는지 알 수 없지만 아쉬운 데로 먹어준다.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우연히 도서관 서가에서 라면 한 그릇을 끓이는 여정을 담은 책을 만났다. 라면을 끓이는 일이 어쩌면 저렇게 성스러운가?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과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음식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라면에 진심인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라면이 얼마나 해로운 음식인지 그렇게 되뇌었건만 아직도 가끔은 물을 올린다. 한국인의 입맛에 딱 맞는 한 컵을 위해 잠을 지새우고 어떻게 먹어야 가장 덜 해로울지를 고민했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다 결국 라면도 잡탕도 아닌 이름 없는 한 그릇을 만들고 나는 또 후회할 것이다.
"오늘 점심은 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