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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라 오드리 Jan 13. 2022

여행이 늘 핑크빛은 아니다

숙소 사기사건

다시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다.  

헝가리는 생각보다 날 우울하게 만들었다. 낡은 기차, 오래된 역내. 곳곳에 묻어있는 암내.

수많은 비둘기들. 어딜 가나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여긴 좀 분위기가 달랐다. 


이른 새벽에 오른 기차는 금연석이 아닌 흡연석이다. 여기저기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는 노동자들의 지친 피로를 대변한다. 이번 기차는 검문만 두 번째다. 유럽에서 외곽으로 멀어질수록 검문은 더 자주 있었다. 기차 안에 유일한 까만 머리를 가진 나는 잔뜩 주눅이 든 채 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행 한 달째. 가방이 점점 무거워진다. 38kg 배낭은 내 상체를 모두 가릴 만큼 컸고 가방을 선반에 올리는 건 이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쉽지 않았다. 뱃속에서 다시 신호를 보내온다. 새벽부터 기차를 타느라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줄곧 담배연기는 마시고 있었군. 가방 안에 비상식량은 모두 떨어졌고 이제 경비도 바닥이다. 늘 숙제처럼 날 따라다니는 일정들, 허기진 배는 점점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여행노트에 미리 적어둔 여행지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맞은편, 한때 화려했을 법한 스카프를 두른 여자가 듣는다면 참 배부른 소리 한다고 생각할 텐데. 


8월 28일 오전 9시 반. 부다페스트 중앙역에 도착했다. 예상시간보다 20분이나 늦었지만 유럽의 기차 시간치고는 잘 지켰다. 서둘러 배낭을 메고 역 밖으로 나가니 예상 밖의 풍경이 나를 기다린다. 오른쪽에는 맥도널드. 왼쪽에는 버거킹. 이제 막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헝가리가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가난한 여행자인 내게는 다행인지도 모른다. 배낭이 더 무겁게 느껴지기 전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환전을 안 해서 주머니에는 버스요금이 없다. 단 3일 머물 예정이라 환전도 하지 않았다. 일단 예약한 숙소부터 찾아 잠시 눕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제 해가 높이 떠오른다. 곧 있으면 더워질 텐데 점점 어깨가 조여 오지만 속도는 늦출 수 없다. 30분은 족히 걸었다. Vaci uta 이 근처 어딘가가 숙소다. 왔던 길을 다시 걸었는데도 숙소로 보이는 곳을 찾지 못했다. 헝가리는 영어도 통하지 않는데... 간신히 주소를 보여주고 길을 물었는데 그 집은 호스텔이 아니란다. 입구에는 Hostel 이란 단어 대신 Apartment rent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다. 이대로 포기는 없다. 다시 그 근처를 한 바퀴 돌아 거리를 확인했다. 12시. 등이 다 젖어버렸다. 쉴 자리를 빠르게 찾았다. 


8월의 헝가리는 여행객으로 넘쳐난다. 정신을 차리고 급히 환전부터 했다. 중앙역에서 밤을 지새울 용기는 없었다. 다행히 근처 호스텔에 짐을 풀었다. 이제 남은 돈은 20Ft. 물 한 병도 살 수 없다. 가방을 뒤져 남은 비스킷으로 속을 채웠다. 오늘의 일정을 확인하니 어부의 요새에 다녀와야 한다. 한쪽에서 요란하게 화장하는 학생들을 뒤로한 채 가방을 챙겼다. 


이정표를 보고 열심히 걸었는데 무슨 생각으로 반대편으로 내려왔을까? 아까와는 달리 평범한 주택이 즐비하다. 하나 둘 가로등이 켜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들은 낯선 여행객이 아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물었지만 역시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왔던 길인데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다. 왜 지도도 챙겨 나오지 않았을까? 오기란, 몸을 힘들게 한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화려한 야경이 눈앞에 있다. 

여행서에서 몇 번이고 확인했던 헝가리를 대표하는 사진. 실제로 보고 싶었던 야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그저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뛰었다. 내가 묵을 숙소는 가장 번화가에 있었다. 거리에 즐비한 테이블이 너무 싫었다. 





오래전 이 이야기가 떠오른 건 아이들 덕분이다.

"선생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 최악의 여행은 뭐예요?"

여행기를 써보자는 아이들이 꼭 좋았던 기억만 써야하냐고 묻길래 안 좋았던 여행도 좋다고 했더니 내게 되물었다.


여행이 늘 좋은 건 아니다.

40일을 계획하고 떠났던 유럽 배낭여행은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가끔은 혼자인 게 싫었고 함께하고 싶었다.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을 때는 더더욱 집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선생님 경찰에 신고해야죠!"

"진짜 나쁜 사람이네. 그 호텔 비싸요?"

나를 대신해 억울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화면 넘어 메아리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렇게 무용담을 들려줄 수 있어서. 좋은 이야기는 쉽게 잊힌다. 

오히려 잊고 싶은 기억은 오래도록 남는다. 


헝가리를 떠나는 길목에 우연히 발견한 작은 상점에서 하나에 500원 정도 하는 도자기 보석함을 다섯 개 샀다. 

앙증맞은 크기에 파란색 물감으로 채색된 보석함은 아직도 내 서랍에 보물을 간직한 채 남아있다.


여행기록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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