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책 읽는 가족 선정
초등학교 6학년. 멋도 모르고 서울 생활을 시작한 나는 무척이나 고단했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가면을 쓰고 진짜 친구는 모른 채 외로운 시기를 보냈다.
얼굴이 유난히 하얀 친구는 우리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다.
어느 날 친구가 서점에 간다길래 따라나섰는데 그 친구가 아주 얇은 문고 책을 하나 골랐다. 그때 난 처음으로 세계문학을 접하게 되었고 혼자 용돈을 모아 책을 사러 서점에 들르는 친구를 가끔 따라가 책 구경을 하고는 했다. 내 외로움을 달래준 첫 책은 바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었다. 친구가 먼저 읽고 내게 빌려준 그 책은 어린 나이에도 큰 충격을 받았나 보다. 그때 좀 더 책을 많이 읽고 도서관도 다녔으면 좋았겠지만 난 책 보다 친구가 더 좋았다. 곧 중학생이 되었고 중학교 1학년 생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 사이에서 존재감 없는 아이였고 허송세월을 보내다 무심코 도서관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책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글도 쓰고 싶었고 시화전이나 백일장 대회에 나가면서 글쓰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친구가 없어도 좋았다. 책이 친구였고 외로워도 속상해도 즐거울 때도 일기장에 털어놓으며 나 스스로를 키워나갔다.
아이들에게 도서관만큼 좋은 놀이터는 없었다. 유모차에 태우고 또 유모차에 매달려서 도서관을 다녔다. 다행히 아주 멀지 않은 곳이었고 자연스럽게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준 곳도 도서관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교구를 빌리고 다양한 문화수업을 들었고 어린이집에 보내고부터는 내가 듣고 싶은 강의를 들으러 날마다 찾아갔다. 언제부터인지 그곳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개 숙여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유명한 작가를 만나고 교양을 쌓고 나를 알아가고 지식을 쌓는 문화창고로 변모하고 있었다. 1년 동안 제공된 그림책 수업을 통해 지금의 나로 성장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은 가야금, 코딩, 역사, 만들기, 과학 등등 다양한 수업을 무료로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도서관을 놀이터 삼아 자랐다.
도서관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은 것은 작년이었다. 코로나로 도서관이 문을 닫자 정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함을 느꼈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도서관 강사로 일하기 시작한 나는 주말이면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세 곳의 도서관을 방문했고 갈 때마다 트렁크 하나 가득 책을 빌려왔다. 빌려온 책은 다 읽지 못해도 다음 주면 반납하고 다시 책을 빌려오길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도서관에 책이 어떻게 분류되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자기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도 스스로 깨치게 되었다. 책 편식이 심해지자 픽션과 논픽션을 고루 빌리도록 했고 그중에 꼭 사고 싶은 책은 서점에 가서 직접 구매도 했다. 사실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일하러 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린 그 생활이 즐거웠고 도서관의 다양한 행사를 제일 먼저 알게 되었다.
옛날에는 반상회를 했었다. 동네 다양한 소식은 엄마가 반상회를 다녀오시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반상회가 사라진 후 그 지역의 다양한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건 바로 도서관 게시판이다. 내게는 그 게시판이 정말 꿀 정보가 되었다. 크게 사교육을 하지 않고도 정말 많은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연예인을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우리 아이들에게 연예인은 바로 그림책 작가님이다. 작가님의 책을 직접 사서 독후활동을 하고 수업이 끝나 긴 줄을 서서 사인을 받는 건 무척 감동적이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추억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초등학교 고학년이지만 나와 함께 그림책 작가를 만나러 가고 그분들의 책 소개를 찾아본다. 아이돌이나 배우보다 더 관심이 많은 그림책 작가는 아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꿈 지도 도서관입니다. 올해 책 읽는 가족에 선정되셔서 안내전화드렸어요." 올해 여름 코로나 이후 처음 떠난 가족여행에서 받은 전화였다. 남편과 독일가문비나무 숲을 산책 중이었는데 난 너무 놀라 다시 물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길다면 긴 여정이었다. 무언가 큰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어느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힘들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이들과 책을 고르고 함께 나누는 시간이 무척 행복했다. 오늘 도서관에서 상장을 받고 큰 아이에게 물었다.
"연우야~ 도서관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연우한테 도서관은?"
"도서관은 꿈 지도이다! 책을 읽고 있으면 내 꿈에 한 발짝 다가간 거 같아."
어제 학원에서 늦게 돌아오는 길에 왜 공부를 하냐고, 공부가 재미있는지 물었더니
"공부가 재밌지는 않지만 내 꿈을 위해서 그걸 참아낼 만큼 난 내 꿈이 소중해. 그래서 난 계속 공부를 열심히 할 거야."
라고 말하던 의젓한 딸아이다. 언제 이렇게 커버렸는지...
답은 없어요.
특별히 정해진 건 없지만 제가 하나 깨달은 건
꾸준히 하는 거예요.
그것만큼 좋은 건 없어요.
어제 [미라클 루틴] 염혜진 작가님이 북 토크에서 해주신 말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엄청난 금전적인 유산을 물려줄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내 삶에 있어 영원한 친구가 될 수 있고 멘토가 될 수 있고 꿈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를 물려주는 데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간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이 무척 기쁘다. 내가 육아를 하면서 가장 잘한 일이다.
나는 내가 참 좋다.
나는 내가 참 좋다.
나는 내가 참! 좋다!!!
정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