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나에게 바라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았을 거다. 상위권에 들지 않아도 되니 그저 밥벌이할 만큼의 성적은 유지하길, 부유하게 살진 않아도 경조사비는 재 때 챙길 수 있는 어른이 되길, 그 정도만을 바라셨을 거다. 결혼해서는 시가에 밉보이지 않으면서도 당당히 살았으면 하셨을 거고, 비건인지 뭔지 한다지만 건강 해치지 말고, 가끔은 남몰래 소고기를 먹어주길 바라는 정도 말이다. 자식에 대한 기대치가 이토록 평균인데도 나는 살아오는 내내, 때마다 부지런히 엄마를 실망시켜왔다. 그 유구한 실망의 역사 속 기억나는 장면 몇 개를 꺼내보려 한다.
10살 즈음 학교에서 글쓰기로 최우수상을 받은 적이 있다. 전교생이 모인 아침 조회 시간에 구령대로 불려 올라가 상장을 받았다. 같은 운동장에 서 있던 우리 언니는 동생 이름이 들리자 깜짝 놀랐다고 했다. 정작 나는 스피커에서 익숙한 이름이 울려 퍼지는 걸 들으면서도 ‘한솔이'라는 이름의 아이가 있나 보다...... 하며 멀뚱히 서 있었다. 대회를 나간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명된 학생이 나오지 않자 맨 앞에 있던 담임 선생님은 뒤돌아 나를 급박하게 불러댔다. 같은 반 아이들도 일제히 내 쪽을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나는 영문을 모르는 채로 쭈뼛쭈뼛 걸어 나갔다. 그날 상장을 가지고 집으로 가면서도 분명히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라 여겼다. 이 상의 진짜 주인인 ‘한솔이’가 오늘 마침 결석을 하는 바람에 착오가 있던 것일 테다. 빠르면 오늘 저녁 이 소동의 진실이 밝혀질 것이고 그러면 학교에서 집으로 전화가 올 것이다. 전화를 받은 엄마는 손에 힘이 빠져서 쥐고 있던 상장을 바닥으로 떨어뜨릴 것이고 자식에게 받은 깊고도 깊은 실망감을 극복하지 못해 내복 바람의 나를 현관 밖으로 내쫓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나는 어두운 계단에 앉아 오돌오돌 떨며 견딜 수 없는 억울함과 왠지 모를 미안함에 엉엉 울어버리고 말겠지.
나중에 알고 보니 얼마 전 선생님이 숙제로 내준 독후감 써오기가 나름의 교내 글쓰기 대회였던 모양이었다. 그때 내가 낸 '견우와 직녀' 독후감이 우리 학년에서 1등을 한 거였다. '한솔이'라는 아이는 없었고 그 상은 정당한 내 것이었다. 티 나게 좋아하진 않으셨지만 엄마는 그때 뭔가 기대하셨을 것이 분명하다.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는 건 책상에 오래 앉아있을 수 있는 아이라는 것이고, 책상에 잘 앉아있는 아이는 학교 공부도 잘할 것이라 자연스럽게 기대하지 않으셨을까? 그러나 슬프게도 글을 써서 상을 받는 건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기본 교육 시스템에 매우 부적합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학습 능력이 영 발달하질 않았다. 영혼은 이불 속에 그대로인 채 빈 껍데기만이 등교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많은 보호자들이 그러하듯 우리 엄마도 내게서 어떠한 천재성을 발견하려 했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 머리는 날 닮아서 좋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우리 부모님이라고 안 했을 리 없다. 나도 나의 가능성이 궁금은 했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수많은 솔루션을 별말 않고 다 따라보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내게 공부 머리가 없다는 사실이 더 드러날 뿐이었다. 엄마는 나를 보습학원도 보내보고, 속셈 학원도 보내보고, 학습지도 시켜보고, 소규모 그룹 과외에도 시켜봤지만 변함없이 성적은 처참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도, 고학년 때도 늘 한결같이 나머지 공부를 하는 둘째 딸을 보며 엄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일찍부터 수학을 포기한 학생들을 ‘수포자’라고 한다던데 그렇게 따지면 나는 ‘산포자’다 산수부터 포기했기 때문이다. 루트가 웬 말인가 나는 나눗셈부터 막혔었다.
수업도 잘 듣고 선생님 말씀도 잘 따르고 교복도 안 줄여 입고 숙제도 잘 내는데 신기하게 꼴찌인 애들이 있다. 바로 나다. 언젠가부터 나는 스스로의 하위권 성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극복해보려 했지만 재능도 없고 관심도 없는 주입식 교육과는 어째 요만큼도 친해지질 못했다. 수업 시간엔 선생님 목소리를 BGM 삼아 교과서 구석구석에 뭉크의 절규 캐릭터를 그려 넣으며 엄마가 나의 무식함을 인정해 주는 날이 오기를 조용히 바랄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의무교육을 등한시한 채 상식이 좀 없고 맞춤법도 자주 틀리는, 하지만 마음만은 따듯한 청소년으로 늠름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옆 옆 동에 사는 Y는 나와 동갑이고 같은 교회 다른 학교에 다녔다. 외동딸인 그 애는 공부를 아주 잘해서 반에서 1,2등을 한다고 했다. Y의 엄마와 우리 엄마는 친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Y의 가족을 엄마가 잘 챙겨주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Y와 영어공부를 함께 하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바로 Y의 엄마였다. 고마운 배려였다. 그러나 우리 둘은 수준 차이가 엄청났기 때문에 내가 오래 버티질 못했다. 늘 그날 배운 것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집 문을 나섰는데 그 사실이 꽤 절망적이었던 것 같..... 지 않고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게 문제였던 걸까? 이제 와 느끼는 건데 나의 이런 태평함이 당시 미성년 자식의 앞길을 책임지고 도모해야 하는 엄마의 억장을 여러 번 무너뜨렸던 거 같다.
초중고 모두 괴로웠지만 그나마 고등학교 생활은 견딜만했다. 나의 진로가 음악 쪽으로 보다 분명해지고 있는 시기였기에 부담이 덜 했나 보다. 편안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주 가끔은 반에서 중간 정도 성적이 나올 때도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시험을 치고 온 날이면 엄마는 늘 기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 잘 본 거 같아?
그러면 나는 어깨를 펴고 뻔뻔하게 말했다.
완전 잘 봤지. 전교 1등 할 듯! 떡 돌릴 준비 해야 될 것 같은데?
늘 이렇게 대답하는데도 엄마는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끝날 때마다 눈을 반짝이며 매번 같은 질문을 했다. 도대체 나의 무엇을 믿고 저렇게 끊임없이 희망적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뭉클하면서도 끝도 없이 미안해졌다. 미안할수록 나는 더 유쾌해지고 뻔뻔해졌던 거 같다. 공부도 못하는데 우울하기까지 하면 부모 속은 더 타들어갈 테니까.
얼마 전 엄마는 사위인 김종현에게 불쑥 나의 과거를 꼰질렀다.
소리 새끼(진짜 새끼니까 욕 아님) 옛날에 수학 30점인가 40점 맞고 온 날 있었거든. 그때 뭐라고 했는지 아니?
뭐라고 했어요?
시험지 흔들면서 지난번 보다 10점이나 올랐으니까 피자 시켜달라고 하더라.
기억 못하고 있었는데 엄마 입으로 들으니 너무 웃겼다. 엄마는 기가 막혔다면서 저런 녀석을 감당할 수 있겠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김종현과 나는 깔깔대며 웃었다.
엄마는 지난날의 무수한 실망과 단념을 통해 나라는 사람을 알아갔던 거 같다. 내가 능구렁이처럼 "이제 같이 늙어가는 처지 아니겠습니까 어머니." 하며 농담하는 요즘도, 여전히 우리는 새롭게 서로를 알아가고 있다. 엄마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디서 저런 특이한 애가 내 뱃속에서 나왔을까 하는 표정을 보는 것이 재미있다. 나라면 저러지 않을 텐데. 나라면 저럴 수 없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리는 듯하다. 서로를 다 안다는 듯이 구는 건 어느 관계에서도 좋지 않고, 특히 가족은 더 조심해야 한다. 엄마가 나를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는 것이 내심 좋은 이유다.
내가 어떤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 엄마는 늘 궁금해하고 무심히 질문한다. 쉽게 틀린 거라 단정하지 않고 내 긴 이야기도 참 잘 들어준다. 그러면서도 본인이 옳다고 여기는 건 공들여 설득한다. 그러면 나도 귀 기울여 듣는다. 엄마가 자기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이런 따듯하고 다정한 성정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 사람 품에서 자랐기에 내가 낮은 학교 성적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태평하게 웃을 수 있었다는 것을, 그런 태도는 생각보다 살아가는데 꽤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엄마는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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