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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소리 May 07. 2021

즉흥형 인간의 여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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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인 수원에서 학교가 있는 천안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던 대학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자취방에 짐을 놓고 여유롭게 수업에 갈 요량으로, 평소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시간에 기차에 오른 것이 문제였다. 목을 옆으로 한껏 꺾은 채 깊은 잠속을 헤매느라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고 만 것이다.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땐 이미 낯선 이름의 간이역에 다다르고 있었다. 더 갈 수는 없으니 우선 내려야 했다. 여긴 어디고 목적지에서 얼마나 더 온 것일까. 귀중품도 없으면서 가방은 어찌나 세게 끌어안고 있었는지 양쪽 팔이 다 욱신거렸다. 그렇게 기차는 플랫폼에 나 하나만을 덜렁 남겨두고 무심하게 떠나버렸다.



핸드폰으로 지도 앱을 켜고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다행히 엄청나게 멀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택시를 타면 요금은 좀 나오겠지만 수업엔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시간이었다. 상황 파악이 어느 정도 되니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계획 없이 당도해버린 그곳은 세월이 정답게 느껴지는 오래된 기차역이었다. 그렇게 의자 몇 개와 화장실이 전부인 대합실에 서 있자니 오래된 영화 속에 들어온 듯 묘하게 낭만적인 기분이 들었다. 당장 택시를 타러 가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어느새 나는 간이역이 주는 고상한 멋에 홀려 학생에서 여행자로 모드를 전환하고 말았다. 그렇게 수업을 자체 휴강해버리고 출구를 나서 낯선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날씨도 좋았다. 건물들은 낮았고 골목들은 평범했다.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여기저기 기웃대다 보니 금세 오후가 되었다. 역으로 돌아와 학교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출발하는 정류장과 내가 내릴 정류장은 그 노선의 시작과 끝이었기에 한참을 가야 했다. 달리는 버스 창 너머로 저녁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선물 같았던 그날의 여행을 마무리했다.



사실 나는 이렇게 드라마틱 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서 짧은 여행을 자주 하는 편이다.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불쑥 영화관에 가 연속으로 두 작품을 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듣다가 세 시간 넘게 산책을 해버리기도 한다. 갑자기 도서관에 가서 책을 엄청 빌려오기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배가 고프면 시장에 들러서 끌리는 음식을 먹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나에겐 다 여행처럼 느껴진다. 친구를 만나러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을 때 취소 문자를 받아도 별로 화가 나지 않는다. 불현듯 생겨버린 용돈 같은 시간을 어디서 신나게 보낼까 고심하며 주변을 검색한다. 어떨 때는 검색도 안 하고 그냥 아무 데나 내려버린다. 그리곤 눈에 보이는 커피숍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는 거다. 그럴 때를 대비해 소설책 하나 정도는 늘 가방에 넣고 다닌다.






이런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김종현은 크고 작은 일정들을 항상 기록해 놓는 계획형 인간이다. 우리는 서로를 신기해하면서도 자주 곤란해한다. 그가 매일 저녁 '오늘 몇 시에 잘 거냐'물으면 나는 '자고 싶을 때 잘 거'라 답한다. 또 매주 수요일 즈음에 '이번 주말에 뭐 먹고 싶냐' 물으면 나는 '그건 주말의 내가 알 것'이라 답한다. 물론 한식, 양식, 중식처럼 대략적인 카테고리라도 일찍이 말해 줌으로써 그의 금요 장 보기(그렇다 그는 금요일마다 장을 본다)를 수월하게 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날의 내가 뭘 먹고 싶어 할지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을까. 저 질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니 확실히 이상하다. "미래의 너는 뭘 먹고 싶니?"라고 묻는 것이니까 말이다.



재작년 겨울, 우리는 2박 3일 제주도 여행을 갔었는데 마지막 날 나는 김종현에게 사죄해야 했다. 당시 나는 주 3일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기에 밤낮이 완전히 바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여행을 갔으니 김종현의 시차를 따라가지 못해 해롱 걸렸음은 물론이고, 그런 몸 상태를 이유로 그가 짜놓은 일정을 어그러뜨리기 일쑤였다. 한창 신나있어야 할 저녁 8시부터 나는 이미 깊은 수면 중이었기에 김종현은 숙소 티브이를 틀고 딱새우를 먹다가 나를 원망하며 잠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뾰로통해진 것의 진짜 원인은 순전히 나의 태도에 있었다. 자고로 여행 계획을 세우는데 참여하지 않은 자는, 계획한 자의 일정에 매 순간 감탄하며 우주 기운으로 호들갑을 떨어주어야 하는 것임에도, 나는 그 본분을 망각하고 만 것이다. 깨어 돌아다니는 시간에도 물에 불린 미역처럼 의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걸어 다녔다. 그러다 김종현이 마음에 쏙 들어 하는 카페에 갔었는데 나는 나오자마자 거기가 얼마나 별로였는지 여러 이유를 들며 눈에 불을 켜고 떠들었다. 나라는 인간은 남에겐 안 그러면서 왜 김종현에겐 그리 쉽게 뻔뻔해지는 것일까. 이 때문에 여행이 망할 수도 있음을 감지하고서도 나는 좀처럼 미안해하질 않았다.



제주도 겨울의 저녁 하늘



그렇게 마지막 날이 왔다. 아침에 혼자 시장에서 고기 국수를 먹고 온 김종현이 뭔가 결심한 얼굴로 어디에 들러서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나는 두려웠다. 왜냐면 김종현처럼 하나도 안 무서운 사람이 삐졌을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렌터카 반납을 두어 시간 남겨두고 우리는 해안 도로를 달려 끝 지점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그는 무엇이 서운했는지 차분히 풀어 이야기해 주었고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지도를 보며 동선을 고민하고, 통장 잔고를 확인하며 예산에 맞춰 숙소를 검색했을 김종현의 모습을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이 미안해졌다. 이후 나름의 변명을 좀 해보았지만 내가 생각해도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난 그에게 좋은 여행 파트너가 아니었다. 즉흥형 인간과 계획형 인간이 뭔가를 함께 할 때 쉽게 서운해질 수 있는 쪽은 아무래도 계획형 인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다 즉흥형이라는 사람이 뻔뻔하기까지 하면 그야말로 파국인 것이다. 나는 나의 이기심을 백번 인정하고 사죄하는 것으로 파국을 면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꼼꼼히 루트를 짜고 비행기 표까지 예매해야 하는 류의 여행에 굉장히 취약하다. 대화중에 여행 이야기가 나오면 순식간에 재미없는 사람이 되고는 한다. 언젠가 나의 '여행 욕구 없음'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즉흥적인 성격에서 그 답을 찾았던 것 같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는 일상 속에서 어딘가로 자주 떠난다. 물리적으로 따지자면 그 바운더리가 무척 좁고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지만. 내겐 충분히 흥미롭고 신이 나는 일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여행 욕구 없음'이 아니라 '여행 욕구 늘 채워져있음'인 것이다.



그렇지만 취약할 뿐이지 싫어한다는 건 아니다. 의욕 없는 내 멱살을 잡고 낯선 곳을 다녀줄 사람이 있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예상치 못한 곳들을 신나게 끌려다닌다면 아마도 무척 피곤해하면서 속으론 변태처럼 웃고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김종현과의 제주도 여행도 나름대로 무척 즐기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외갓집 식구들과 패키지여행을 떠났을 때도 그랬다.(그때도 제주도였다.) 가족여행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손자 서열에 있는 이들은 자의식을 내려놓고 그저 따라다녀야 한다. 우린 작은 봉고차에 실려 빽빽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바다 한 번 보지 못하고 '무슨 무슨 랜드' 같은 곳만 돌아다녔는데, 돌고래 쇼를 보면서는 그 귀한 생명들이 너무 불쌍해 구석에서 남 몰래 울었다. 성 박물관에 간다 했을 땐 은근한 기대를 했건만 미성년자 동생들을 챙겨야 했기에 눈물을 머금고 입구에서 어른들을 기다려야 했다. 그 외 대부분의 시간은 우리 할머니와 숙모 할머니의 가방 셔틀로서 존재했기에 그곳이 제주도건 아니건 내게 중요한 건 할머니들의 안위뿐이었다. 오롯한 감상 없이 차례대로 퀘스트를 완수하듯 뛰어다녔던 그 여행도 나름의 재미로 가득했다. 귤 따기 체험 끝에 필연적으로 맞이한 건강식품 강매 코너마저 흥미로웠다. 혼자였다면 결코 겪지 않았을 순간과 가지 않았을 장소였기 때문이다.



어쩐지 여행 준비의 고단함은 상대방에게 슬쩍 미루고 즐거움만을 취하려는 심보가 들켜버린 것 같다. 그렇지만 무엇을 제안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팔랑일 여행 파트너가 필요하다면 나 같은 사람이 제격임을 알려주고 싶다. 별거 아닌 풍경에도 맥없이 만족해버릴 테니 그저 데리고 다녀주기만 하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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