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별 일상 기록기 - 2월 넷째 주
[이번주 BGM : 김마리 - 파란]
근 몇 개월 만에 다시 부산으로 여행을 왔다. 부산은 이미 여러 번 방문한 여행지이지만 이번 여행의 특별한 점은 혼자 즐기는 여행이라는 점이다. 계획한 것은 아니고 충동적으로 내버린 삼일절 휴가와 맞물려 꽤 긴 휴가동안 어디를 가야 하지 않을까 고민을 하다가 부산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마음을 굳히자마자 속전속결로 부산 가는 교통권이랑 숙소를 끊고는 가족들에게 여행일정을 알렸다. 누구랑 가냐는 말에 혼자 간다고 얘기하니 딱히 별 말은 없었고, 오히려 왜 또 부산을 가냐는 질문을 건네셨다. (바다가 보고 싶은 뚜벅이가 갈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 여하튼, 충동적으로 결정한 여행이지만, 지난주 일기에 적었던 혼자 노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얘기했던 것도 그렇고 다시 한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순간이 찾아왔구나 싶었다. (인생은 무스비…)
충동적으로 정한 것 치고는 뭘 할지 정하는 건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됐다. 부산 자체를 이미 여러 번 방문했다 보니 이것저것 해보고 싶다는 욕심보다는 이전 방문에서 미처 하지 못 했던 것들을 이번 기회에 해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정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덧붙여 홀로 여행의 재미 중 하나가 내 맘대로 다 할 수 있다는 점이기도 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걸 그 어떤 협의 없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할 일은 크게 3가지였는데, 미술관 가기, 에스프레소 카페 가기, 송정 해수욕장 가기였다.
미술관은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굉장히 많았는데, 특히 무라카미 좀비라는 특별전의 줄이 어마무시하게 길었다. 약 1시간가량 줄을 서서 들어갔는데, 부산 여행을 통틀어 제일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린 게 아닌가 싶다. 여하튼, 유명한 작가라 그런지 미술계에 문외한인 필자도 어디서 봤던 캐릭터들이 있었다.
전시의 주제는 크게 귀여움, 기괴감, 덧없음 3가지로 구성됐으며, 많이 알려진 Mr DOB, 플라워부터 시작해서 일본의 문화를 사유하며 분명 느껴본 적 있는 기괴함, 그리고 원폭 패전 후 단절된 문화의 여파로 미성숙하게 발전된 오락성을 의미하는 덧없음의 순서로 이어졌다. 작가가 의도한건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전시 주제가 굉장히 기승전결처럼 느껴졌다. 가볍게 향유할 수 있는 귀여움을 시작으로 뭔가 이상하고 낯선 느낌을 주는 기괴함으로 주제부에 가까워졌다가, 덧없음으로 핵심을 딱 짚으면서 빠르게 결말로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로 기억에 가장 남는 건 전시 이름과 동일했던 작품인 ‘무라카미 좀비와 폼 좀비’였다. 앞서 많은 작품들이 캐릭터로 표현이 됐다면, 이 작품은 좀비라는 가상의 개체를 세세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도, 군데군데 희화적 요소가 있어서 (가령, 내장 속에 있는 캐릭터라던가, 하수구에 있는 쥐들이라던가) 마치 공포영화를 보는데 갑자기 귀신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백텀블링을 하는 듯한 무서우면서도 웃긴 느낌이었다. 특히, 폼 좀비는 강아지 좀비였는데, 좀비 모습인데도 강아지 특유의 귀여움이 남아있어서 안타까우면서도 괜히 눈길이 한번 더 가는 그런 좀비 작품이었다.
위의 특별전을 보고 나오니 이미 체력이 70% 정도 깎여져 있었지만 정신력(?)을 발휘해서 남은 전시들도 다 챙겨보고 나왔다. 미술관만 가면 유독 욕심이 폭발하는 것 같다. 체력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전시를 다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넘친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여행지에서의 미술관 탐험은 항상 신선함과 뿌듯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이번 여행의 두 번째 Todo 리스트인 에스프레소 카페는 달맞이길에 위치한 곳이다. 한참 에스프레소에 꽂혔을 무렵, 부산여행을 가게 되면서 찾은 곳이었는데 그 당시 아쉽게도 last order 시간이랑 겹쳐서 가지 못했고, 그 이후로도 위치가 여행 일정이랑 잘 안 맞아서 계속 못 갔었다. 사실상, 이번에 못 했던 걸 하자는 생각을 하자마자 첫 번째로 떠올린 곳이기도 하다. 카페는 서핑과 에스프레소를 좋아하는 카페 사장님의 취향과 맞닿아 커피 향 가득한 장소 곳곳에 서핑 보드가 놓여 있었다. 작고 소담하면서도 애정 넘치는 손길이 닿았다는 게 느껴져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항상 여유로운 카페 사장님을 꿈꾸는 필자이기에 나중에 카페를 차린다면 이번처럼 누가 봐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카페를 만들고 싶다.
이날은 각기 다른 3잔의 커피를 마셨는데, 모두 단 맛을 좋아하는 필자의 입맛에 딱 맞는 커피였다. 특히, 맨 처음에 마셨던 Caffe Padova라는 메뉴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3잔 마시는 걸 지켜보신 사장님이 커피 많이 마신 것 같다며 물 잔을 건네주셨는데, 지금까지 기억나는 기분 좋은 상냥함이었다. 사실, 예전에 에스프레소 한번 잘못 마시고 머리 어지러워한 적이 있어서 3잔을 시키고 나서는 살짝 걱정이 됐었는데, 다행히 아무런 부작용 없이 멀쩡했다. 매일 주중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로 훈련이 된 건지 모르겠지만, 맛있는 커피는 몸이 잘 받아주나 보다. 하하.
이것저것 할 일로 꽉 찬 첫날 일정과 다르게, 둘째 날은 ‘송정 해수욕장 가기’라는 계획 한 가지만 세운 채 여유롭게 돌아다녔다. 사실 여유롭다기엔 이동거리 자체가 꽤 되어서 실제로는 체력 소모가 꽤 되는 일정이었다. 직전 부산 여행 때 기껏 해변열차 타고 송정 해수욕장까지 갔다가, 케이크 픽업 일정 때문에 바다 구경을 못 한 채 돌아왔던 게 기억이 나서 선택한 장소였다. 서핑 장소로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직접 가서 보니 왜 유명한 지 바로 느낌이 왔다. 확실히, 광안리, 해운대 해수욕장과 비교해서 바람도 많이 불고 파도도 거친 게 서핑하기 딱인 파도가 이런 거구나 싶었다. 아직 2월 말의 겨울 바다였는데도 갖가지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저게 바로 열정이구나 싶고, 조만간 가는 보라카이에서 정말 끝장나게 놀고 와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잠시 일상을 내려놓고 다녀온 이번 부산 여행은 짧은 기간 대비 정말 알차게 잘 다녀왔다. ‘나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마음으로 정말 하고 싶은 것만 쏙쏙 골라서 실컷 하고 왔기 때문인지 매번 여행 마지막 즈음에 들던 자글자글한 마음의 잔재도 딱히 안 느껴졌다. 더불어 정말 오랜만에 다녀온 홀로 여행이었는데, 이번 여행으로 여행지에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더불어 모든 게 온전히 다 내 몫이라는 점에 정말 매료되었다. 다음은 어딜 갈까!
노는 게 제일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