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로소로 Feb 07. 2023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선을 넘었어




시작은 순수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 중 청소를 기갈나게 하는 분이 있다. 항상 정돈되고 깔끔하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심지어 육아도 잘하는 거 같은 스멜이 풍긴다. 나 또한 꼼꼼하다고 자부하지만(생각만 많을지도) 청소와 정리는 평생 나와 거리 두기를 하고 있어서 친정식구들이 우리 집에 오면 정리 좀 해라는 소리가 나온다. 가끔 시어머니가 말없이 들이닥칠 때면 더러움에 민망해서 화가날지경이다.




이 집에서 오래 안 살 거라고 외치며 이사 가면 산다고 버티고 버티다 그 앞날이 안 보여 5년 만에 수납장 두 개를 샀다. 이사 가면 정말 풀세트로 식기세척기까지 다 드리고 갈 거다.

장을 사면 깨끗해질 줄 알았는데 물건을 숨기고 있을 뿐이지 그다지 달라질 것이 없었다. 다행인 건 천성이 뭘 쟁기는 스타일은 안되어서 남들 팬트리에 착착 열 맞춰가 내 눈에는 다이어트는 개나 줘로 보였다.






꾸역꾸역 지저분함을 유지했고 심지어 작가놀이에 빠져서 뭐 이쯤이야 눈 감고 그 시간에 책한 자 더 보거나 글을 쓰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나를 지지해 주지만 오븐장을 샀으면 전에 있던 장을 버려야 하는데 그곳에 책을 차곡차곡 쌓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었다.




장을 산지 100일이 지났고 미니멀작가님이 자꾸 글을 올린다. 점점 닮고 싶어지는 욕망이 불을 붙었고 저 정리해 볼게요 기다리세요 가당치도 않게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래 오늘이야 진품이 도 겨울방학이 끝나고 봄방학 전에 숨을 불어넣어 보자 다짐했다.






첫 번 째 일단 책

정리를 잘하지는 않지만 다행스럽게 소유욕은 없어서 두 번 다시 안 볼 책들은 예쁘거나 비싸도 쉽게 "너 탈락" 훠이 휘 뒷집 할아버지께 드릴 수 있었다. 100권 버렸는데 비었다는 느낌이 안 든다.



두 번째 아이들이 활동한 자료들과 장난감들 탈락!

유치원, 학교에서 그리고 만들었던 것 중에 예쁜 그림만 빼고 다 정리했다. 엄마는 아이 어린 시절 하나하나 모아 둔다는데 짐스러워서 눈에 사랑스러운 그림 위주로 소장했다.



세 번째 옷

나중에 입는다는 옷 치고 입는 거 거의 없다. 아이는 점점 성장해서 키가 크고 나와 남편은 조금씩 거대해지고 있으므로 버린다. 그리고 옷 사는 게 귀찮아져서 집 앞에 있는 구제샵에서 싸게 산 것들이 많아서 버려도 아깝지가 않다.






한 달에 한 번씩 비워낸다고 비웠는데 왜 매번 100리터 쓰레기봉지가 꽉 차고 재화용 봉지가 넘칠까? 얼마나 많은 물건들을 이고 지고 사는지 버릴 때마다 죄책감이 든다.

욕실에 텅 빈 통들과 안방 화장대 서랍까지 싹싹 비우고 남편 방으로 향한다.  



우리 집 오빠(남편)를 소개하자면 직업병으로 물건을 테트리스처럼 잘 쌓고 설거지나 신발을 기똥차게 세탁하며 본인 신발을 새것처럼 잘 신고 다닌다

그 오빠에게도 단점이 있는데 과자와 콜라를 사랑하며 책상이 매우 지저분하다. 매번 이렇게 안 치울 거면 먹지도 말라고 경고장 발급하면 며칠 깨끗하다. 책상 옆에 있는 콜라병, 고래밥, 나초, 시리얼통까지  현모양처 코스프레 하며 치워준다.






마지막 피날레는 장롱

집에 농이 있지만 거기서 내 옷이 나올 때는 희비 일 때이다. 좋은 날 입고 나갈 밝은 정장과 슬픈 날 입을 검정정장 그 외는 쿨쿨 자는 가방과 돌반지 정도이다.

나머지는 남편 옷들이 리빙박스에 뒤섞여 있어서 이참에 정리 좀 해주자 싶었다. 몇 달 전에 샀던 속옷 정리함을 오빠에게도 하사하며 그래 미운 놈 떡 하나 주자 빤스와 양말을 야무지게 쏙쏙 넣어주다가 이놈에 인간 15년 전에 샀던 골댄잠바가 아직도 있지 아우!! 왜 아직도 안 버리고 끌고 다니는지 이참에 버린다며 그 옷을 찾다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보정하지 않았는데 후광이 비친다.




와따!!! 이 오빠 보소~ 게임 취미라 한결같이 하는 건 알아 덜 놀랬지만 저 책자...  WORLD of WARCRAFT 소름이 돋는다.

이미 집에 3권이 자리 잡고 있어서 어제 몇 권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이제 안 살 거지? 물어볼 때 대답 하지 않았다. 예전 거짓말할 때 눈빛이 매우 불안정했는데 이 능구렁이 같은 사람 눈빛이 안 흔들렸어!!!



샀다는 것보다 어제 그 대답 안 함에 배신감을 느껴서 ( 남자들이여 다시 한번 말하지만 걸릴 때까지 말하지 말라 미리 혼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정리함에 넣다가 중단했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오빠! 내가 옷 정리하느라 정리함 봤는데 게임팩이 아주 주렁주렁 나오더라 내가 사지 말라고 했는데 너무한 거 아냐??"

"아냐 그거 안에 빈통이야!"

"아.. 그래? 그럼 재활용에 버릴게 지금 집 정리 중이었거든."

"뭐 또 수고스럽게 그러지는 말고... 그냥 둬 괜찮아"

"지금 운전 중이야? 옆에 직원도 같이 있지?"

"응. 있지 "

"일단 알았어. 집에서 이야기해 "

전화를 끊고 방 정리 중단되었고 이 걸 어떻게 하지 생각하다 어차피 샀고 지금 말해봐야 감정만 상할 거 같아서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집에 와서도 길게 말하지 않았다. 유일한 취미 게임이 그다지 줄어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법륜스님이 말씀하시길 상대방을 고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면 되지만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으니 같이 살던가 못 살겠다 싶으면 같지 살지 말라고 하셨다.

내가 생각을 달리하는 그 길이 제일 빠른 길이라는 영상을 보고 나서 길게 말하지 않고 싸움도 줄어들게 되었다.



보살이 나셨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결혼해서 10년을 살다 보니 붙박이장스타일 그분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가 게임인걸 어쩌겠나 싶다. 나가서 술을 먹고 낚시를 하고 다니는 것보다 내 마음엔 여기까지 이해하는 게 속 편하기도 하고 내 취미가 독서와 글쓰기라 가족들에게 잔소리할 시간이 많이 줄어든 여유라고 하자.



남편도 내가 글 쓰는 게 웃길 테고 똑같이 자판 두들기는 게 같으므로 우리는 같은 시간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훈훈한 잉꼬부부로 마무리하련다.






 



작가의 이전글 맥주는 내 친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