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당신, 살인자인가요?
영화는 1년 전에 일어난 평범한 부부의 살인 사건에서 시작합니다. 범인은 사건 현장에 피로 ‘怒’라는 글자를 남기고 사라지는데요. 그렇게 1년이 지나 수사는 공개수사로 전환되면서 성형을 했을 거라는 범인의 몽타주가 공개되고 그즈음 도쿄, 치바, 오키나와에 과거를 알 수 없는 세 남자가 나타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를 이유 없이 믿어주고 함께 살아가기 시작되는데요. 텔레비전을 돌리다가, 거리의 전단을 보다가 우연히 보게 된 그 범인의 몽타주를 보며 사람들은 불현듯 갑자기 나타났던 낯선 남자의 정체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올해 초에 영화 포스터에 적힌 '내가 사랑하는 당신, 살인자인가요?'라는 말에 끌려 혼자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보고 나서 행복한 영화는 아니에요. 대신 많은 생각을 남기는 영화였어요. 제목은 '분노'이지만 영화가 이야기하는 대부분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사람에 관한 이야기죠.
도쿄의 나오토
유마와 나오토는 성소수자예요. 유마는 도쿄의 유흥가에서 말수가 적은 나오토를 만나고 쉽게 자신의 집을 내어주게 됩니다.
유마 널 의심하고 있다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
누구보다 날 믿고 있는 걸 알아. 믿어줘서 고마워.
유마는 자신의 믿음이 들키는 것을 꺼려했지만 실은 아픈 어머니께 소개할 만큼 나오토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치바의 타시로
저는 아이코와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해져요.
작은 마을에서 가출 후 유흥가에서 일하다 돌아온 아이코와 그녀의 아버지 마키는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참으며 살고 있습니다. 아이코가 가출할 때 즈음 마을에 온 타시로는 외지인이고, 비정규직 노동자이며, 과거에 어떻게 지냈는지 알 수 없는 청년이죠. 밝은 아이코와 빠르게 가까워진 타시로는 아이코와 동거를 하기로 하는데요. 그런 두 사람을 보는 마키는 왠지 마음이 불안합니다. 마키의 고민을 들은 그의 조카는 '혹시 아이코가 행복해질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하고 되묻고, 마키는 딸을 믿는 다고 말하지만 사실 마키의 마음속에서는 그런 일을 했던 딸이 만나는 남자가 좋은 사람일 리 없다는 생각, 딸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는데요. 아이코 역시 타시로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믿고 있다고 말했지만 실은 자신에게 다가온 타시로를, 그를 믿는 자신에 대한 불신을 품고 있죠.
오키나와의 타카네
오키나와의 편이 된다거나 그런 건 몰라도 네 편이라면 언제든지 되어줄게.
이즈미는 편부모 가정의 자녀예요.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며 전전하는 엄마에 대한 미움도 있고 오키나와에 이사를 오게 되면서 어딘가 마음 붙일 곳을 찾고 있었죠. 친구 타츠야와 놀러 간 무인도에서 만난 여행객 타카네를 만나고 마음 둘 곳 없는 자신과 어딘가 동질감을 느꼈는지 금세 친해지죠. 타츠야 역시 이즈미에게 생긴 일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할 때 언제든 자신의 편이 되어주겠다는 타츠야에게 금방 마음을 줘 버립니다.
영화가 끝나고 이 영화가 참 마음에 든다라고 느꼈던 이유는 모든 등장인물의 마음이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영화 장르가 추리 스릴러에 가까운데요, 그래서 영화를 보면 자연스럽게 범인이 누구일지에 대해 추리하게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이 사람이 범인인가?'로 시작해서 '이 사람은 범인이 아니었으면, 아니어야 돼' 이런 마음이 드는 이상한 체험을 할 수 있었어요. 저는 참고로 이 사람 중에 범인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관람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왜 이렇게 다들 쉽게 믿어버리는 거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전부 주변인이에요. 성소수자이고 성매매업소에서 일한 여자에 편부모 가정 아이까지 모두 어딘가 마음 기댈 곳이 없이 방치된 인물들이죠.
범인이 살인을 저지른 이유가 더위에 지친 자신에게 건넨 차가운 물 한 잔의 의미를 친절이 아닌 동정이라 믿었기 때문일 거라고 말해요. 그는 세상을 믿지 않죠. 영화 속 세상도 마찬가지예요. 범인은 다른 용의자들과는 다르게 아주 맑은 날 햇살처럼 등장해요. 영화 속 세상은 빛을 통해 관객들을 속이려 하는 걸 수도 있어요. 믿음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제목이 분노인 이유는 믿음을 잃은 자들이 믿음에 대한 선택의 앞에서 고뇌하고 그 선택에 대해 분노하는 모습을 그리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고 있단 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믿지 않는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람, 믿을 사람이 필요한 사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는 믿음이 얼마나 나약한지, 선택의 결말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그들을 보는 일이 참 슬펐어요.
이즈미의 대사에서 분노는 싸운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 것, 아무리 울고 화를 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데요. 영화가 끝이 나고 깨진 믿음 앞에 선 그들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분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