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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 좋아하세요?

개딸 에어리얼과 아버지 트라이튼의 모험

내가 어릴 때 영화관에서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를 보고 대성통곡을 했다는데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인어공주>가 한국에서 개봉한 해에 나는 아마 네 살이나 다섯 살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부모님이 대충 20년간 놀림거리로 삼았던 나의 대성통곡 썰은 아빠가 영화관에서 나를 업고 나오는 것으로 끝난다. 왜 울었냐고? 인어공주가 아빠랑 헤어져서. 그래, 에어리얼 아빠가 에어리얼한테 사람 다리를 만들어주는 바람에 아빠는 바닷속에, 딸은 육지로,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게 디즈니의 엔딩이다. 디즈니 딴에는 인어공주가 물거품으로 사라지면 아가들 충격받을까 봐 원작을 각색해 왕자랑 결혼하는 해피엔딩을 만들어줬건만, 이 네 살 어린이는 왕자랑 결혼하는 해피엔딩보다 아빠랑 헤어지는 새드엔딩의 충격이 더 컸나 보다. (그리고 그 어린이는 잘 자라 먼 훗날... 부모님 집에 가면 조금씩 가슴이 답답해지다가 내 집으로 돌아와 홀로 침대에 누우면 그제야 기분이 흐뭇해지는 3n살 성인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인어공주>는 언제나 나의 최애 디즈니 영화였다. 영화관에서 울었던 기억은 안 나지만 집에서 같은 비디오를 수천 번 돌려봤던 기억은 선명하다. 디즈니 키드였던 유년시절 그 외에도 <미녀와 야수>, <신데렐라>, <백설공주>, <알라딘>, <정글북>, <라이언킹>, <타잔>,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등등 온갖 디즈니 영화들을 섭렵했지만 <인어공주>는 이상하게 언제나 나의 최애 픽이었다.


며칠 전 친구가 디즈니 플러스 구독을 하더니 내게 계정 셋방살이를 시켜주었을 때도 익숙한 작품들 사이에서 내가 고른 첫 번째 픽은 <인어공주>였다. 그걸 하필 언니랑 나란히 앉아서 봤는데 트라이튼이 에어리얼에게 다리를 만들어주는 장면이 나오자 언니가 또! 나를 쳐다보며 묻는다. 울어? 너 옛날에 여기서 울었는데. (저기요? 난 이제 네 살이 아니라고요.)




저는 사실 디즈니의 저작권 정책이 두려운 3n살 디즈니 키드가 되었습니다. 디즈니 플러스 캡쳐본... 올려도 되는 건지...





20세기 디즈니 키드가 다시 본 <인어공주>


거의 이십여 년 만에 <인어공주>를 처음부터 끝까지 봤다. 비교적 최근작인 <코코>나 <겨울왕국>을 떠올리면 1989년에 제작된 <인어공주>와 그들 사이에 놓인 30년이라는 '세월'이 새삼스럽게 하나의 실체가 되어 다가왔다. 그 30년의 세월을 헤아리자면 나는 마치 머릿속 상상의 주마등처럼 디즈니의 작품들을 훑을 수도 있었다. <백설공주>로부터 시작해 <코코>까지. (<백설공주>가 1959년작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제작 시기로 따지면 30년이 훨씬 넘는 기간이긴 하다.)


넷플릭스와 티빙에 뇌가 절여진 3n살의 눈으로 본 <인어공주>에는 '이게 이렇게 단순했던가? 내 기억에 더 요란했는데' 싶은 장면도 있었고, 또 예상외로 작은 옥의 티(?)도 한 두 개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강아지가 오른쪽 뺨을 핥았는데 앵글이 바뀌자 인물이 왼쪽 뺨을 만지고 있다든가...) 하지만 오히려 이 거대한 시간의 간극이 느껴지는 장면들을 보면서 디즈니 전성기 시절의 작품을 보고 있다는 감동이 같이 밀려왔다. 내가 사랑한 레전드, 인어공주.


그리고 또 한 가지 발견. 나는 이게 누구의 성장 서사인지 처음으로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누가 성장하는가? 누가 선택했는가?


모든 이야기에서 우리의 주인공, 우리의 영웅은 길을 떠나 시련을 겪고 시련을 극복해 자신만의 모험을 완수하여 집으로 돌아온다. (혹은, 새로운 집을 발견한다.) 주인공은 모험을 통해 필연적으로 성장한다. 이는 우리가 사랑하고 디즈니가 사랑하고 할리우드가 사랑한, 세상 모든 이야기의 법칙이다. 주인공의 모험(Journey)은 문자 그대로의 모험이기도 하지만 비유적인 의미의 모험일 수도 있다. 인간 세계를 사랑한 에어리얼이 마녀를 찾아가 목소리를 내어놓고 인간이 되는 것 역시 모험임이 틀림없다.


또 누구의 모험이 있는가? 트라이튼이다. 트라이튼은 이를 테면 자녀가 좋아하는 아이돌 굿즈를 박살 내며 자녀를 단념시키고자 하는 부모다. (기억하는가? 에어리얼이 난파선에서 수집해온 보물들을 보고 화가 난 트라이튼이 물건을 전부 박살 낸다.) 혹시 그 시절 미국에도 이런 부모가 흔했던 걸까? 아무튼 한국에선 취미에 몰두하는 청소년 자녀의 물건을 부모가 부수는 유구한 전통이 있긴 하다. 물론 1990년대엔 아이돌 '굿즈'라는 게 아직 없었다. 다만 H.O.T ‘브로마이드’를 박박 찢는 부모가 있었을 뿐이다. (feat. 성동일 from <응답하라 1997>)


딸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가진 트라이튼에게 인간들이 사는 육지는 야만의 땅이다. 마녀 우르술라는 말할 것도 없이 너무 위험하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딸 에어리얼을 가능한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분리(위험으로부터 격리) 정책을 펼친다. 에어리얼이 인간 세계와 사랑에 빠지자 트라이튼은 딸을 회유하기도 하고 물건을 부수고 협박하기도 하며 궁정음악가인 세바스찬을 시켜 에어리얼을 감시하기에 이른다. (세바스찬이 제일 불쌍함.) 트라이튼의 분노와 이 모든 행위들의 배경은 딸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트라이튼의 개딸은 결국 마녀의 꼬임에 넘어가 사고를 치고, 마녀의 정원에 영원히 노예로 사로잡힐 위기에 처한다. 자신의 개딸을 너무 사랑한 아버지는 스스로 마녀에게 왕좌를 내어주고 딸 대신 노예로 사로잡히기로 선택한다. 개딸 에어리얼은 마녀에게서 풀려나는 대가로 아버지를 잃을 위기에 처하는데, 그 순간 우리의 남자 주인공 허수아비 왕자(에릭)의 처음이자 마지막 활약으로 마녀가 처단되며 트라이튼을 비롯한 마녀의 모든 인질들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문제의 장면, 아버지는 육지의 왕자를 바라보며 슬퍼하는 딸을 보고 그녀에게 다리를 만들어주기로 결정한다. (그걸 본 네 살 관객은 울기 시작한다.)


이 모험을 시작한 자는 '표면적으로는' 마녀와 거래를 한 에어리얼이지만, 이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하는 자는 트라이튼이다. 그는 처음부터 그를 추동해왔던 두려움, 즉 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마침내 스스로 이겨낸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딸을 인간으로 만들어 육지로 보내며 딸과의 이별을 받아들인다.


어린이 관객이었던 시절, 나는 인간 세계를 향한 에어리얼의 찐 사랑에 아버지가 감복(?)한 나머지 딸을 인간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이건 전래동화에 절여진 뇌다.) 혹자는 마녀를 처단해준 저 인간 사위 놈이 착한 놈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즉 인간은 야만적이고 위험한 존재라는 오해가 풀려 비로소 딸을 보내줄 수 있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트라이튼이 딸에게  다리를 만들어  이유는, 아무리 개딸을 사랑해도 개딸을 자기 맘대로  수는 없다는 사실을 존나 깨달았기 때문이다. 딸은 끝내 자신이 소유할 수 없는 별도의 인격체이며, 바다의 왕인 자신의 평생을 걸어도 세상 모든 위험으로부터 끝내 딸을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존나 씨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험을 통해 마침내 깨닫는 , 성장하는 , 그리하여 다른 선택을 하는 ,  자가 성장 서사의 진짜 주인공이다<인어공주>는 에어리얼이 사랑을 쟁취하는 서사이기도 하지만, 트라이튼의 부모 되기 서사이기도 하다는 걸, 나는 이번에야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이거 설마 고길동 같은 건가


둘리를 보면서 둘리가 불쌍하면 아직 어린이고 고길동이 불쌍해지면 어른이 된 거라던데 트라이튼의 부모 되기를 발견하는 게 설마 그런 원리인가 싶어 순간 쓸쓸해지긴 했으나... 아무튼 내가 늙은 건 잘 모르겠고 내 최애 디즈니 <인어공주>를 다시 봐서, 그리고 새롭게 봐서 즐거운 주말이었다.


그리고 언니가 나 쳐다보면서 너 또 울 거냐고 놀릴 때 울진 않았지만 솔직히 속으로 진짜 좀 슬펐다.


아니, 이게 안 슬프다고? 정말로?


그냥 옆동네 시집가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이제 난 인간, 너는 인어. 우린 다른 종족이 되어서 다른 삶을 살 거라고.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유산을 뒤로하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서 내 조상 중 그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인간이 되기 위해 떠난다고. 부모와 형제들과 그 모든 인어 세계의 유산들과 바이바이입니다. 우리 아빠는 바닷속에 있고 이제 난 육지에서 혈혈단신으로! 이게 안 슬퍼?!


뿌엥 눈물 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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