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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커피를 빼앗긴 위염 환자

카페인 중독자의 미세한 슬픔

처음엔 은은하고 잔잔하게 기분이 나빴다.


왜 이렇게 은은하게 기분이 안 좋지? 하고 여러 번 자문한 결과: 답은 커피를 못 마셔서였다.


상반기에 갑자기 위염 증상이 나타나면서 아침 공복에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아악 속이 쓰린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잠깐 왔다. 별로 알고 싶진 않았는데. 그리고 커피, 술, 매운 것을 먹으면 속이 아프더니 나중엔 이런 걸 먹을 때마다 설사를 했다. 뿐만 아니라 밥을 먹을 때마다 위장이 멈춰서 내내 체한 느낌이 들다가, 겨우 소화가 되어 위장이 비워지면 또 비워진 대로 속이 쓰렸다. 병원에 가서 위염 및 식도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몸에 안 좋은 것들을 끊었다. (사실... 밥 먹고 3시간 내에 눕지 말라는 조건이 제일 지키기 어려웠다. 어떻게 집에서 안 눕고 앉아 있을 수 있냔 말이야) 유튜브에 나온 양배추 요리를 찾아서 열심히 해 먹었다.


당시엔 커피를 마시고 싶어도 못 마시니 뭐랄까 잔잔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것은 무언가 분명히 화가 난다고 할 만큼 명백히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눈치채기 힘들 만큼, 그러나 일상이 은은하게, 우울했다. 그래서 한참이나 지나 이게 커피 탓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래도 잔잔하게 우울하긴 했지만 카페인을 끊고 2주째부터는 부수적인 효과로 불면증이 조금 완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은 배우는 게 없다. 그렇게 한 달 정도를 지내고 위장이 괜찮아져서 다시 커피를 한 모금씩 시도해보았다. 완전히 빈속에만 마시지 않으면 별 탈이 나지 않았다. 할렐루야, 위장이 괜찮아졌구나! 다시 커피도 야금야금 마시고 그러다 맥주도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자... 당연하게도... 반성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을 위해 몇 달 뒤,

나의 위장께서 더 큰 심판을 내리셨다.


난 요즘 계속 커피를 못 마신다. 위장님 컨디션이 좋아 보일 때마다 눈치를 보며 홀짝...? 마셔보는데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커피만 마시면 여지없이 배가 아프다. 요즘은 울면서 디카페인 커피를 찾아다닌다. 하지만 디카페인 커피는 내가 알던 그 커피 맛이 아니고... 게다가 디카페인 커피를 파는 카페 자체가 일단 많지가 않다.






커피를 한 번 빼앗기고 나니 내가 커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되었다. 


커피가 너무 먹고 싶다. 내 커피... 내 커피... 카페에서 방금 나온 아주 뜨거운 아메리카노. 카페인 중독자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익숙한 커피 향. 푹신한 소파에 자리를 잡고 뜨거운 종이컵을 쥐고 플라스틱 뚜껑을 열면 크레마의 흔적이 남아 있는 뜨거운 아메리카노의 표면이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린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훅 당겨마시면 적당히 고소하고 산미가 있는 아메리카노가 기분을 나아지게 한다. 이건 무조건이다.


사실 나는 커피보다 카페라는 공간 자체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언제나 카페가 내 사랑방이었다. 사람 만나는 것이 피곤한 내향인 주제에 햇빛을 못 보는 것은 또 싫어해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몇 시간이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집 밖의 장소, 카페가 나에겐 딱이었다. 대학원 입시용 작품은 동네 스타벅스로 출퇴근하며 썼다. 입학 후 매주 마감이 돌아오는 과제를 하기 위해 동네 카페를 전전했다. 그 외에도 발등에 불 떨어진 모든 일을 위해 카페로 달려갔다. 엄청 하기 싫은 일을 싸들고 카페에 가서 일단 커피 한 잔을 하면 주변 환경과 카페인의 상호작용으로 조금은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기분이 되곤 했다.


늘 주변 카페를 전전하던 나의 '드림' 카페에는 큰 창과 높은 천장, 쏟아지는 햇빛, 편안한 책상과 의자, 맛있는 커피, 깨끗한 화장실이 있어야 했으며, 공간이 넓고 사람도 많지만 카페 음악은 들릴 정도로 적당히 시끄러운 곳이어야 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동네에서 그런 곳을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했지만, 사실 그렇다 해도 상관은 없었다.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에 끼어 앉아 옆 사람을 신경 쓰지 않기 위해 귓구멍을 이어폰 음악으로 막고 방금 위장에 때려 넣은 카페인의 힘을 빌려 다리를 달달 떨면서 뭐라도 우격다짐으로 써 내려가던 순간들이, 팬데믹 이후엔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앗 근데 다리를 왜 떠냐고? 사실 난 카페인에 예민한 체질이라 커피를 마시면 심장이 빨리 뛰고 손이 떨린다. (보통은 이런 경우 커피를 안 마신다구요? 쉿 조용히 해주세요) 아무튼 위장에 카페인을 때려 넣으면 각성 효과가 엄청나서 왠지 다리를 떨면서 일을 해치우곤 했다.


하지만 커피를 못 먹게 되자 내가 카페 공간을 더 사랑했든 커피를 더 사랑했든 그런 건 모르겠고, 커피 맛이 생각나 너무 약이 올라 죽겠다. 난 내 생각보다 더 커피를 좋아하는 카페인 중독자였던 것이다. 날씨가 추워지자 더욱 부럽다. 당당하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켜먹는 사람들이. 난 옆에서 따뜻한 카모마일이나 시켜먹는다.






점점 자유가 줄어든다. 꼭 팬데믹 때문만은 아니다. 팬데믹 이후 카페는 자주 못 갔지만 아메리카노만큼은 회사 사무실에서도 맘대로 위장에 때려 넣곤 했는데... 어쩌면 그동안 너무 건강을 돌보지 않고 마구 살아온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위염 따위는 퇴사만 하면 낫는 병이라던데 이게 다 회사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도 아니라, 아니 전혀 아무것도 아니라, 그저 좀 늙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커피를... 먹고 싶은데... 못 먹어서 화가 난다. 건강이란 건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인생의 잔잔한 슬픔과 잔잔한 분노와 잔잔한 짜증을 주관하고 있다.


아주 잔잔하게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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