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구좌읍의 독립서점 방문기
올해 회사에서 연가보상비가 안 나오는 관계로 12월에 밀린 연차를 한꺼번에 쓸 핑계가 생겼다. 친구와 제주에 가서 3박 4일 요양을 하고 오기로 하고 비행기표를 끊었다.
제주를 여러 번 갔었지만 12월의 제주는 처음이었다.
막연히 제주도를 여름의 섬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연말에 방문한 제주는 생각보다 크리스마스와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제주의 돌담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아무튼 크리스마스 시즌의 제주도도 색다르게 참 좋았다.
요양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곳을 돌아다니진 않았다. 거친 바람과 눈, 비, 우박을 간간히 맞으며 동네 산책을 하고 독립서점 몇 곳을 구경했다. 먹고, 걷고, 비 맞고 우박도 맞고, 소품샵에 가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멍을 때렸다. 날씨가 궂은날이 많았지만 제주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여행 중에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친구와 보며 밤마다 웃었다. 재밌고 멋진 그 사진과 동영상들은 제주에서 우리와 함께 돌아왔다.
그런가 하면 필름 카메라 사진들은 늘 여행이 끝난 후 시차를 두고 도착한다. 서울로 돌아와 필름을 택배로 보낸 뒤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리다 보면... 사진관에서 현상, 스캔된 사진들이 어느 날 메일함에 도착한다. 분명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이지만 핸드폰 사진과는 다른 맛이다.
필름으로 찍은 사진 중 우리가 들른 세 군데 서점을 추려서 올려본다. 모두 낡은 집을 리모델링해서 운영 중인 독립 책방들이었는데 각자의 분위기가 달라 서점만 연달아 방문해도 지루하지 않은 매력이 있었다.
월정리에 있는 책다방은 무인 서점으로 운영된다. 사고 싶은 책이나 소품은 건너편 안채에 있는 옷가게로 들고 가 계산을 하면 된다.
낮은 천장의 오래된 구옥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좁은 서점으로, 모두 조심스럽게 들어와 조심스럽게 기뻐하며 둘러보게 되는 분위기가 좋았다. 책과 함께 다양한 소품들을 팔고 있는데,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는 사장님 취향이 100% 반영된 사랑스러운 고양이 굿즈들이 많았다. 마당에선 사장님이 밥을 챙겨주는 새끼 고양이들이 놀고 있었다.
아니, 사실 월정리에선 어딜 가든 고양이가 넘쳐났다. 모두가 고양이들의 밥을 챙겨주고 모두가 고양이 사진을 찍고 모두가 고양이를 그려서 엽서를 만들고 모두가 고양이 소품을 팔며 길고양이를 위한 캠페인을 벌인다("길에서 태어났지만 우리의 이웃입니다" 등등). 월정리 그곳은 고양이의 천국... 나도 마주치는 고양이 사진을 열심히 찍으며 고양이 엽서를 사고 고양이 키링을 샀다.
사실 첫날은 책다방을 쭉 둘러보고 그림책과 엽서만 샀는데, 떠나기 전 못내 아쉬워 친구 선물로 고양이 키링을 사려고 다시 한번 들른 곳이다.
소심한책방은 종달리에 있다. 우리 숙소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 셋째 날 택시를 타고 찾아갔다. 택시에서 내려 골목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야 했지만 그럼에도 전망이 탁 트인 동네에 자리해 들판 위 덩그러니 있는 서점을 갑자기 발견하게 된 것 같은, 뭔가 영화적인 첫인상을 주었다. 서점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바깥 풍경이 확실히 여행을 왔구나 하는 기분이 들게 했다. 필름에 담진 못했지만 액자처럼 성산일출봉이 보이도록 가로로 얇고 길게 낸 창문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방문한 세 곳 중 소심한책방에 가장 책이 많이, 체계적으로 놓여 있었고 책의 큐레이션도 마음에 쏙 들었다. 또 흥미로운 그림책이 많아 주로 그림책을 고르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내가 소장할 책 한 권과, 선물용 책 세 권 그리고 또 엽서들을 샀다.
소심한책방에서 카페책자국까지는 걸어갔다.
책자국은 서점과 카페를 겸하는 곳이었다. 북카페의 느낌으로 차를 마시면서 자유롭게 꺼내 읽을 수 있는 책들과, 사서 읽을 수 있는 판매용 책들이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
판매용 책 중 어떤 책들은 서점 주인이 직접 쓴 추천의 글이 따로 꽂혀 있어 추천글을 읽고 내용을 짐작해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책의 매력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어떤 페이지가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지 알려주기도 해서 처음 보는 책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바로 들춰볼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서점을 여러 군데 방문했더니 같은 책을 소개하는 추천사를 비교해서 읽게 되기도 했다. 서점마다 주인의 취향이 반영된 큐레이션이 있기는 하지만, 역시 누가 봐도 좋은 책들은 서점마다 공통적으로 가져다 놓고 또 추천사를 쓰게 되는구나 싶었다.
난 김영민 교수의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책자국에서 추천사 때문에 처음 읽게 되었다. 너무 웃겨서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미 나 빼고 모두가 아는 유명한 칼럼이었다. (왜 나한텐 말도 안 해주고...?) 그날 이미 책을 너무 많이 사지만 않았다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살 뻔했는데... 짐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책을 사지 못했다. 조만간 서울에서 또 그 책을 마주친다면 사게 될 것 같지만.
책자국 공간에서 진정한 매력은 큰 나무들이 있는 마당이었는데, 핸드폰으로 사진 찍느라 열중하여 필름에 남기지는 못하였다. 아쉽다.
카메라: Cannon QL17 GIII
필름: Kodak Gold 200
아쉬우니 제주의 다른 카페에서 찍은 사진 한 장 남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