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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보내는 새해 메시지

이상한 꿈을 꾸고 일어났다.


호텔인지 게스트하우스인지 아무튼 어떤 숙소에 머물다 체크아웃 시간이 가까워져서야 시간이 얼마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급하게 많은 짐을 싸기 시작했는데… 짐을 싸면 쌀수록 왜 이렇게 짐이 많은 건지? 이걸 어떻게 다 싸지? 하며 서랍을 열면 또 짐이 한가득 나왔다. 아니 설마? 하고 또 다른 서랍을 열면 또 다른 짐이 한가득이었다. 도저히 정해진 시간 내로 짐을 싸서 제때 체크아웃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 마음이 너무 급했다.


신년 벽두부터 이런 꿈을 꾸다니 별로다. 2021년의 마지막 날, 친구 집에 가서 신나게 잘 놀다 잠들었는데 자다가 이런 꿈을 꾼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렇게 생생한 꿈은 아니었던지 아침에 일어나선 까먹었다. 친구와 헤어져 집에 와서야 갑자기 꿈 생각이 났다.


어쩌면 그냥 잠자리가 낯설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편으론 지금 내가 이런 식인가 싶은 생각도 든다. 이렇게 허둥대면서 애매하게 억울한 상태가 지금 시점 내 인생 아닌가 말이다. 체크아웃 시간 마냥 다가오는 게 뭔지 나도 실체는 잘 모른다. 그러나 뭐든 간에 빨리 결단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적 느낌이다. 지금의 삶이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것 마냥 임시의 삶처럼 느껴진다. 그 상황에 난 혼자 준비가 안 됐다는 위기감만 느끼면서, 아니 그런 핑계를 대면서 허둥대고 있는 건가? 2022년엔 뭐라도 결정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신년 벽두부터 엉뚱한 꿈을 꾸게 한 걸지도?






어젯밤엔 친구와 브런치 이야기를 잠깐 했다.


브런치는 시작한 지 3개월쯤 되었다. 소소한 즐거움도 성취감도 있었으나,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동력에 대해 생각하자면 그건 왠지 분노 같다. 생각해보면 마감도, 원고료도, 그 어떤 강제성도 없는데 난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브런치를 해서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그냥 직장인은 항상 출근 때문에 화가 나있으므로, 나는 이곳에서 열심히 화를 내는 것뿐. 나의 동력은 오로지 분노... 하기 싫은 출근과 회사의 미친 사람들로 인한 분노뿐이다.


그 말인즉슨, 왠지... 퇴사하면 브런치에 글을 안 쓸 것 같다. 아니, 쓰려고 해도 별로 쓸 말이 없을 것 같다.


솔직히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분노로 짓는 글은 브런치 에세이뿐만이 아닌 것 같다. 이야기를 쓰고자 할 땐 항상 무언가에 불만을 품었을 때가 더 많지 않았나. 특히 서사의 형태를 빌려 무언가 말할 땐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고서야 글을 쓸 수 없었고, 그 말들은 결국 내가 삶에서 느끼는 불만들에서 나왔던 것 같다.


그렇다면 글은 원래 분노로 지어지는 것인가...?






친구 집에서 늦잠을 자고 일어나 새해맞이 떡국을 먹은 뒤 같이 서점에 갔다. 책을 사거나 이용료를 내면 자리에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는 서점이었다.


알게 모르게 오늘의 몇 장면들을 지나오던 중, 그 서점에서 '어정쩡함'의 예찬론을 발견한 것이다.



아, 어정쩡함! 그건 오래 걸친 외투처럼 내겐 너무도 친근한 말이 아닌가. (중략)
그렇게 불확실한 날들을 10년쯤 보내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그 어정쩡함이 글쓰기의 동력이었음을. 글 쓰는 일은 질문하는 일이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고 혼란스러워야 사유가 발생한다. (중략) 물론 글쓰기로 정리한 생각들은 다른 삶의 국면에서 금세 헝클어지고 말았지만, 그렇기에 거듭 써야 했다. 어차피 더러워질 걸 알면서도 또 청소를 하듯이 말이다.
그날 수업시간에 자기소개를 마치고 나는 말했다.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는 니체의 말대로, 불확실한 삶의 긴장 상태는 글쓰기 좋은 조건이라고. (중략)

나도 20~30대엔 애매함을 배척하고 확실함을 동경했다. 표류보다 안착을 원했다. 돈 걱정 없이 원하는 글을 쓰는 안정된 집필 환경을 꿈꿨고, 내 이름으로 된 책이라도 있다면 존재 증명이 수월하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책상과 고요가 확보된다고 글이 싹 바뀌지 않았고, 책이 나온다고 삶이 확 달라지진 않았다. (중략) 어영부영 이만큼 떠밀려오고 나서야 짐작한다. 인간이 명료함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건 삶의 본질이 어정쩡함에 있다는 뜻이겠구나.

- 은유, 「어정쩡한 게 좋아」,『다가오는 말들』, 어크로스, 2019



막상 서점에서 책을 읽었을  아직 꿈도 기억나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집에 와서 불현듯 꿈의 장면들을 떠올리고 나니, 오늘 오후 책에서 만난 글귀가 뒤늦게 오늘의 장면들을 하나의 맥락으로 꿰어준다. 실은 글이 분노로 지어진다기 보단,  책의 "어정쩡함"이란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엉덩이의 직장인이어야 브런치에 글을  수밖에 없는 강한 동력이 있지 않겠는가. 그럼 이 어정쩡한 상태가 계속 글을 쓰게 해준다는데, 나는 좋아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그나저나 "인간이 명료함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삶의 본질이 어정쩡함에 있다는 뜻이겠구나." 라니.


어떻게   마디의 문장이  위로가 되면서 동시에  시련을   있을까?   줄의 문장이 이렇게 나를 위로하면서 동시에 가혹하게 대할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안온하고 온전하며 어쩌면 완벽한 상태에 대한 희망을 가차 없이 빼앗는 동시에,  어정쩡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게 대체 뭐야... 1 1일부터 이러기야?


근데 1월 1일부터 이런 장면들을 마주하니 우연의 결합이라는 걸 알면서도 조금은 더 의미심장함이 부여되는 듯하다. 지금의 나를 위로하는 건가. 누가? 새해 첫날부터 누가 나한테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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