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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고 나를 좀 더 알게 됐다

독립, 한 번 잡솨봐

의사 선생님은 내게 몇 가지 명언을 남겼다.


일단 사람은… 성인이 되면 부모랑 따로 살아야 해요.



네, 맞습니다 선생님! 저는 돌아버릴 것 같아요우!!!


그때 나는 이제 막 서른 살이 된, 그리고 여전히 부모님 집에 살고 있는 일종의 캥거루족이었다. 나는 꽤나 오랫동안 캥거루족으로 살았다.


내가 처음 독립을 한 것은 비록 계약직이나마 처음으로 월급쟁이가 된 서른세 살 때였다. 그전까지 독립을 못한 이유는 예술을 한다고 깝쭉거리며 돈을 잘 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독립은 단지 부모 집에 사는 불편함을 벗어난다는 것 이상으로 인생에서 훨씬 더 중요한 무엇이었다. 하나의 분기점이랄까. 왜냐면 혼자가 되자 그간 숨어 있던 생각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독립을 한다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참된 내가 '짜잔~' 하는 일은 없다. 나한테서 서서히 무언가 빠져나가며 알게 모르게 새로운 면이 모습을 드러낸다. 분명 내 것인 줄 알았던, 이를 테면 나의 습관과 생각과 취향 중 어떤 것은 알고 보면 내 것이 아니기에, 혼자 있는 동안 서서히 옅어져 썰물처럼 내게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건 뭐랄까 디톡스 다이어트 같다고 할까…? 평생 거둬서 먹이고 재워준 부모의 은혜에 독소를 비유하기엔 너무 불경스럽지만 그 불경함을 잠시 무시해보자(?).


이건 살면서 한 번쯤은 일어날 일이다. 변화는 극적이지 않다. 그래도 그 변화의 내용만큼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헐 너 이런 인간이었구나…" 하고 중얼거리게 되니까.






환장의 콜라보와 밤길


나의 엄마가 아빠와 결혼을 결심한 충격적인 이유는 '데이트하고 항상 집에 데려다줘서'였다. 무슨 말이냐고? 나의 엄마는 밤길을 걷는 것을 너무 무서워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딸이 밤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엄마와 살면서 귀가 시간, 방식에 대한 통제를 많이 받은 편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독립하고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는 내가 생각보다 밤길을 안 무서워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사람이 밤길을 맨날 다녀봐야 무섭거나 말거나 할 게 아닌가? 독립을 한 후에야 내겐 원할 때 언제든 다른 이에게 설명하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외출과 귀가를 할 수 있는 온전한 자유가 왔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나는 엥 뭐야, 밤길 걷는 거 생각보다 기분이 좋은데? 하고 생각하고 만 것이다.





나이를 이만큼 먹었으니 나에 대해 잘 아는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다. 사실 내가 기질적으로 불안도가 높은 사람이라는 것도 서른에 병원을 가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은, 나의 엄마도 나 못지않게 불안도가 높은 사람이라는 것. 아니, 엄마는 못지않은 정도가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 중 제일 심각한 불안맨이다.


의사 선생님은 나와 엄마의 역학관계에 대한 또 다른 명언을 남겼다.


불안도가 높은 사람들끼리 같이 붙어 있으면 시너지 효과가 납니다.
서로 불안에 부채질을 하며 점점 불안도가 올라가는 거죠.
환장의 콜라보가 되는 거예요.



돌이켜 보면 나와 엄마의 역사는 "불안맨과 불안맨의 환장의 콜라보 30년"이란 제목이 어울릴 것 같았다.


나의 엄마는 정말 많은 것에 대해 다채롭게 불안해하지만, 특히 중점적으로 불안해하는 두 가지 카테고리가 있다. 첫째, 범죄. 둘째, 미래.


범죄에 대한 불안은 본능적인 것이기도 하고 또 한국에서 젊은 여성으로 사는 나에게도 당연히 생활의 큰 불안 요소다. 다만 나의 엄마는 유독 그 두려움이 심하고, 그것은 자식의 귀가 시간과 방식에 대한 통제로 이어졌다.


나는 10대 때 생겨난 우리 집 통금 - 밤 10시 - 을 절대 지킬 것을 20대 후반까지 강요받았다. 청소년기에 통금이 있었다가도 성인이 된 후 통금이 사라졌던 대부분의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20대 후반까지 통금 지키기를 요구한 우리 엄마의 집착은 결코 평범한 수준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엄마의 상식에선 목적 없는 외출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것이었고, (나: 산책 좀 갔다 올게. 엄마: 산책? 왜?) 내 외출의 행선지와 만날 사람, 목적을 밝혀야 엄마는 안심해주었다. (누구 만나는데? 어디서 만나는데? 언제 오는데?) 난 사생활 통제가 싫어서 가끔은 만날 사람을 일부러 말하지 않고 다녀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물음표 살인마로 변신한 엄마의 분노를 견뎌야만 했다. (왜 말하기 싫어? 무슨 일인데? 말하면 안 되는 일이야?) 일정상 통금시간이 넘어 집에 들어올 일이 생기면 들어올 때까지 계속되는 전화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하 세상에, 글로 쓰고 나니 더 피곤하다….


슬프게도 모범생이었던 나는 이 부적절한 통제를 25년 넘게 받아들였지만, 이것이 엄마의 불안에서 나온 행동임을 알지는 못했다. 그냥 엄마가 보수적이고 고집스럽고 이상한 '엄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다 얼마 전, 엄마가 이젠 밤이 아닌 대낮에도 낯선 사람을 보면 불안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여태까지 그 모든 행위들의 기저에 엄마의 높은 불안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난 직감한 것이다. 그동안의 집착의 동기를 깨닫자 엄마가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 진짜 무서워서 저랬구나… (그러나… 나도 안쓰러웠다. 아이고 나의 20대여…!!)


결국 엄마와 달리 나는 특별히 밤길에 대한 불안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미처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집으로 갈 땐 스트레스를 받았다. 귀가에 대한 강박과 불안은 모두 엄마의 것이었으나 그 강박과 불안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내 몫으로 함께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후에야 나는 밤길을 걷는 것을, 혼자 하는 산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조금은 놀랐다. 밤에 걷는 것은 대체로(어느 정도 안전한 거리라는 가정 하에), 즐거웠다.


그리고 좀 덜 안전해 보이는 밤 골목도 사실 괜찮았다.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아무도 없는 길을 휘적휘적 걸으며 주변을 염탐하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불안맨이 부릅니다, 내 귀에 정규직


또 하나의 불안, 엄마의 미래에 대한 불안 역시 비슷하게 집착의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두 자녀의 궁극의 정규직 취업에 대한 집착이다.


자식 놈(=나)이 대학원생 나부랭이와 프리랜서 나부랭이로 살며 30대가 훌쩍 넘어버렸지만 나의 엄마는 도대체 '정규직' 취업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틈만 나면 정규직으로 돌림노래를 불렀다. (불안맨이 부릅니다. '내 귀에 정규직.') 서른셋에 일단 어딘가 무기계약직으로 취업을 함으로써 엄마의 후크송은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지만, 그 불씨는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은 엄마의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왜 나의 엄마는 자식이 취업시장에서 성공하기 어려운 조건을 가진채 30대가 되었는데도 내 귀에 정규직 메들리를 끝낼 줄을 모르는가? 이 의문을 친구에게 상담한 적이 있다. 그는 나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부모가 자식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주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대신 자식의 직업이 자식을 책임져주길 기대하는 거야.
사실 누군가의 직업이 그 사람 인생에서 어떤 것도 보장해주지 못하는데도.



친구의 말에 나는 무릎을 치고 말았다. 절대적 불안맨 나의 엄마에겐 자식의 정규직 취업이란 자식 인생을 위한 보험을 의미하는 걸까. 그렇다면 나의 보험 가입 거절로 인해 엄마는 계속 고통받을 텐데…  불쌍한 엄마…. (깊은 한숨) 하지만 보험을 들기엔 나도 그 상품이 딱히 안 땡기는 걸요….


문제는 나도 이것을 엄마의 문제로 밀어 두고 아예 모른 척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불안맨과 불안맨은 환장의 콜라보를 하게 되니까.


독립하기 전에도 프리랜서 나부랭이로 돈은 벌었다. 엄마는 나의 직업을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에겐 직업이었다. 그러나 난 엄마의 돌림노래 정규직 후크송에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틈날 때마다 몇 번이고 정성스러운 노래를 부르는데(=내 미래를 걱정하는 말을 쏟아내는데) 그걸 견디기엔 나 역시도 너무 불안맨이었던 걸까. 나는 많이 괴로웠다.


이제 밤길은 안 무섭지만 내 미래는 나도 무섭다. 밤길 문제보단 내 깜깜한 미래와 대책 없는 자아실현 욕구, 그리고 예상되는 빈곤에 불안은 좀 더 복잡한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밤길에 대한 불안과 마찬가지로, 역시 독립을 하고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 불투명하고 깜깜한 미래 문제에서 나의 불안과 엄마의 불안을 분리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내가 엄마보다 훨씬 게으른 불안맨이라서 엄마만큼의 불안을 계속 느끼기엔 너무 귀찮은지도. 누군가 불안을 상기시킬 때마다 괴로웠던 나는, 이제 조금쯤은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아주 조금...) 하, 나도 모르겠다. 너무 먼 일은 생각하지 말아 버리자.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하렴. 이게 결국 지금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상태다. 그나마도 "정규직!!!"을 부르짖는 사람이 곁에 없어서 조금의 여유가 생겼달까.


대체로 '엉거주춤한 엉덩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던 나의 인생에서 얼마쯤이 엄마의 불안이고 얼마쯤이 나의 불안이었을까. 내 분신과 같은 불안맨과의 물리적인 분리 효과는 어디까지 미칠 예정인 걸까. 모든 건 살다 보면 알게 될까?






썰물은 빠르게 또 천천히 빠지고 있다


빠르게 빠진 썰물은 일단 생활 습관이다. 일단 30여 년간 본가의 규칙을 따르던 청소 루틴은 독립 한 달만에 엉망진창이 되었다(히히 난 지저분하다). 그에 비해 밤길과 늦은 귀가에 대한 다소 로맨틱한 감상은 몇 주 후에야 등장했다. 내 깜깜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에라 모르겠다 정신은 표면화되기에 더 오래 걸렸다.


난 여전히 불안맨이지만 좀 귀찮음이 가미된 불안맨인 관계로, 그리고 밤길을 무서워하지 않고 엉뚱한 자아실현에 관심이 있는 불안맨인 관계로, 엄마와는 또 다른 불안맨의 인생을 살 것이다. 그게 뭔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아무튼 독립생활은 이런저런 이유로 내 인생의 분기점이 되었다.


독립을(를) 획득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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