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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신과 6년

정확한 명칭은 정신건강의학과다.


처음으로 정신과를 찾은 것은 5년 전 대학원을 졸업한 후였다. 당시의 난 우울하고 괴로운 설사쟁이 울보로 살고 있었는데, 병원에 찾아가기 전까지 최소 1년을 '내가 실제로 우울한가 아님 꾀병인가' 고민만 하며 시간을 낭비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병원에 갈 상태였지만, 당시엔 내가 그냥 나약한 인간인 줄로만 알았다. 나는 남들보다 게으르고 스트레스에 취약한 내가 싫었다.


정작 병원은 안 가면서 인터넷에 있는 우울증 자가진단 테스트만 수십 번 반복했다. 우습지만 점수가 높지 않길 바라면서도 점수가 높길 동시에 바랐다. 사실 겁이 났던 거다. 병원에 갔는데 우울증이 아니라고 진단받으면 결국 문제는 내 성격인 거니까. 사실 다들 이렇게 똑같이 힘들지만 잘 견디고 있고 ‘나만’ 나약해빠진 인간인 거라면, 인생에 남은 건 절망뿐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자책도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였다. 또한 게으름도. (자, 여러분 자기가 괴롭다면 일단 병원으로 갑시다.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세요.) 심지어 내가 약물로 컨트롤될 거라 예상하지 못한 과민성 대장 역시 '예기불안'이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증상이었다.


결국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병원에 전화를 해서 예약을 잡았다. 예약이 밀려 있는 병원이라 초진을 한 달이나 기다렸다. 긴장할 때마다 배가 아파 화장실로 달려가던 당시의 나는 병원에 처음 가던 날도 긴장이 되어 화장실을 먼저 갔다.


검사와 진료를 통해 의사 선생님은 내게 중간 수준의 우울, 불안, 강박이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특히 우울은 번아웃을 동반한 것이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무리를 해서 나의 의지도 마음도 뇌도 새카맣게 타버린 시절이었다. 또한 원래 성격상 불안이 있는 편인데 지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 불안을 조절시켜주는 자율신경계 기능이 떨어진 상태라는 말도 들었다. 신경을 튼튼하게 해주는 약의 도움을 받으면 6개월 후에 괜찮아질 것이며, 우울증도 최소 1년 정도 약을 먹으면 많이 좋아질 것이라 했다.


차라리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나니 그렇게 위로가 될 수 없었다. (물론 상의 없이 정신과에 간 것에 엄마가 노발대발해서 난 괴로웠지만... 일단 그건 논외로 하자) 하기 싫은 누군가의 제안을 거절할 때도 우울증 진단은 좋은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난 쉬고 싶고 숨고 싶었다.




그 후로 정말 1년에서 1년 반 정도 약을 먹고 상황이 좋아졌다. 상태가 좋아지자 어떤 게 정상적인 상태이고 어떤 게 비정상적으로 우울한 상태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다들 나 빼고 존나 이렇게 안정적인 상태로 살고 있었다니. 나만 몰랐다니...) 물론 가끔은 친구들과 잘 놀고 집에 들어와서 갑자기 쓸쓸한 마음이 들어 오늘 집에 권총이 있었다면 좀 더 쉽게 자살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병원에 가서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하나요?" 난 드물게 그런 생각을 했고, 그건 점점 더 드물어졌고, 지금은 죽음이라는 항목이 나의 선택지들 사이에서 아주 희미해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치료를 시작한 지 2년쯤 지나, 약을 서서히 끊는 과정에 들어갔다. 약을 서서히 줄이다가 이직 등 스트레스받는 환경에 놓이면 잠시 복용량을 올렸다가 다시 줄이는 과정이 몇 번 있었다. 슬슬 다른 일을 해볼 만한 의지와 에너지가 생겨났다. 하지만 내 처방전에 가장 최후까지 남아 있는 듀미록스 100mg 한 알만큼은 계속 사라지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한 후 받는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의사 선생님도 완전히 약을 끊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그 상태로 한 달에 한 번씩 같은 처방전을 받으며 2년이나 더 지나, 햇수로는 벌써 6년째가 되었다.


그나마 의사 선생님이 말해준 지금의 긍정적인 지표 중 하나는, 나의 부정적인 감정과 에너지가 나를 향하지 않고 적절히 외부를 향하는 것이다. 자기반성도 하지만 어떤 것은 남 탓도 하고, 회사 탓도 하고, 부당한 건 부당하다 생각해버리는. 얼마 전, 재검사를 진행했다. 우울증은 이제 정상과 우울의 경계 정도에 머무는 수준이라고 했다. 자율신경계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다만 만성피로의 증거로 부교감신경이 과하게 활성화되어있을 뿐이었다. (만성피로요? 이건 다 회사 때문이다. 난 선생님 말 믿고 이제 남 탓만 한다. 망할 놈의 회사 것들.)


모든 게 괜찮다. 듀미록스 100mg을 매일 먹지만 거의 최소한의 용량이고 난 우울증의 측면에선 안정적인 상태다.




그러나 솔직히 슬프다. 지금의 나는 다른 자리로 옮겨 앉아서도 또 번아웃이다. 대학원을 졸업하며 얻은 번아웃 동반 우울증을 치료하고 이번엔 회사원이 되었더니, 다시 번아웃이다. 지난 1년 내내 진료 시간에 제일 많이 들은 말은 "그건 번아웃 증상인 것 같네요."였다. 집에 오면 기절하는 것도, 피곤한데 핸드폰 쥐고 늦게 자는 것도, 주말 내리 쉬어도 피곤한 것도, 동료들에게 필요 이상 짜증이 나는 것도.


그렇다고 의사 선생님이 당장 직장을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말하거나 빨리 결단을 내리라고 압박하지 않는다. 의사도 환자들의 개인적이고 불가피한 사정까지 다 해결해 줄 수 없으니까. 나도 번아웃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지만 쉽사리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퇴사 후의 대책이 없어서.


하. 번아웃에서 탈출하여 또 번아웃이라니. 우울과 불안 모두 치료하고도 번아웃은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번아웃이 자주 온다면 내게 문제가 있는 걸까? 왜 내 인생은 번아웃의 반복인 걸까?


그래도 의사 선생님이 남탓을 하게 해주어 좋다. 오늘도 일부러 이렇게 생각한다. 우린 번아웃 권하는 사회에 살고, 나는 번아웃 권하는 회사에서 번아웃 권하는 상사와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나의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질병. 번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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