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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K Nov 14. 2021

삶의 철학 22 - 착하게 살지 않기

착하게 살라는 윤리적 명제 뒤에 숨겨진 은밀한 함정을 피해가는 지혜

"착하다 -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 


영어로는 Good-Hearted로 번역되는 "착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듯 행동과 마음씨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는 어릴적부터 가정과 학교 혹은 종교기관 등으로부터의 반복된 교육을 통하여 "착하게"의 메시지가 담긴 가르침를 들어왔다. 그리고 이 바람직한 지침을 삶의 윤리적 준거로 받아들이고 헐리우드 히어로 영화의 사악한(evil-hearted) 악당들이 처절하게 패배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착하지 않으면 저렇게 되는 거야"라고 확신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살면서 "착하게 살면 손해본다." 라는 말도 많이 들어왔다. "착하게" 사는게 옳긴 한 걸까? 아니면 "착하게" 살면 우습게 보여 피해를 보게만 되는 걸까? 실제로 정말 착하게만 살아온 친척이나 친구들이 가까운 지인들에게 사기를 당했단 말들도 적지 않게 들었다. 정말 이들이 착했기 때문에 나쁜 일을 당한걸까 궁금했다.


난 이 막연한 "착하게 살아라" 란 가르침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마냥 "착하게"가 아닌 현명한 "착하게"로 사는 지혜를 얻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는 "착하게"의 올바른 이해와 함께 "착하지 않은" 또다른 세상에 대한 반면교사적 분석도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세상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혹 "착하게 살지 않기"로 작정한 나쁜 이들을 만나더라도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위험은 피할 수 있으리라.


자선을 베풀다. 정의롭다. 선량하다. 양보한다. 수용적이다. 배려한다. 이해타산적이지 않다.
말과 행동이 바르다. 인사를 잘한다. 겸손하다......


우리가 막연히 생각해 온 "착하다"의 개념은 들여다 본다면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 경제적 측면에서 착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돈을 벌거나 혹은 지출할 때 자신만의 이익을 생각하기 보다는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결정을 할 때 개인적 손실까지도 감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직원의 큰 실수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한 회사 대표가 그 손실을 직원에게 묻지 않는다면 그는 경제적 관점에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특히 구체적인 손실이면서 동시에 대표의 자산에 직접적 피해가 되는 일임에도 그 책임을 불쌍한 직원에게 지우지 않는 것은 웬만한 배포로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다른 예로 불우이웃 돕기성금에 기부를 하는 사람이나  아이들을 구하자며 성금을 모으는 유니세프의 대표자의 경우 대중들은 그들을 착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 있으나 사실  노출된 표면적 행위만으로 그들이 착하다는 것을 입증하  근거 아무것도 없다.  유니세프 대표의 연봉이 6억이 넘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처럼 말이다.

좀 더 흔한 예를 들어보자.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에게 친구간의 금전거래는 옳지 않다며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 그럼 이 사람은 착하지 않고 사악한 것일까? 아니면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친구를 믿고 돈을 빌려주는 것이 옳은 걸까? 이러한 지인간의 금전 거래는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사회적 상호 작용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담되는 친구의 금전 요청에 대해 현명하게 대처하는 지혜로운 "착한" 방법을 고민해보자.


친구나 연인 관계는 법적 제약이 없는 유일한 사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헤어지게 된 연인관계를 법으로 바꿀 수 없다. 그런데 모든 금전 거래는 금액의 크고 작음을 떠나 철저하게 법적 계약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친구(연인)이 돈을 빌려달라는 것은 우정과 사랑만으로 유지되는 사적 관계를 끊고 법적 관계를 시작하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즉,  심하게 말한다면 그 상대방은 우정과 사랑을 댓가로 돈을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 모르는 사람이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한다면 협박범이나 강도 취급을 받을 것이다. 명심할 것은 그 혹은 그녀이미 당신과의 관계를 하찮게 여기고 있으며 이미 관계를 끊을 각오까지 하고 돈 얘기를 꺼낸 것일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진정한 친구 혹은 연인이라면  상대의 어려움을 먼저 알고 도움을 주었어야 한다. 반대로 상대방이 최소한의 자존심이 있고 당신을 정말로 아끼는 사람이라면 결코 먼저 돈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친구, 연인 관계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정말로 지혜로운 "착한"친구가 된다는 것은 친구에게 돈은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베풀어주는 것이다. 상대가 다시 잊지않고 은혜로 갚는다면 훌륭한 "친구"를 둔 것이고 반대로 잊어버린다면 당신은 "친구" 가 아닌 "날강도"와 비슷한 인간을 만난 것 으로 생각하고 기억에서 편히 지우면 된다.


둘째, 규범적 측면에서 착하다는 것이 있다.


규범적으로 착한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나 조직이 정한 법과 규범을 잘 따르고 지키는 사람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 "그 친구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는 말은 지키라고 하는 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무조건 법규를 지키고 잘따르는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과거 몰래 카메라를 통해 심야 건널목 신호등을 지킨 양심 운전자를 찾아서 큰 선물을 주는 TV 프로가 있었는데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당시 TV에서 심야에 신호등을 지킨 사람은 100명 중 1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99명은 모두 선량하지 않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심지어 그 방송을 지켜보던 시청자의 99% 역시 간단한 교통법규를 위반한 적은 한두번 있기 때문에 신호를 지키는 행위만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과 달리 서양인은 우리가 평생 들어왔던 "선(善)", 즉  "착하게 살아라"라는 주제보다는 사회적 옮음에 대한 판단기준인 "정의(正義)"에 대한 가치를 더 중요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한 때 인기를 끌었던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이 하버드대 학생들과 "정의"를 주제로 문답식 강의 토론 현장을 촬영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강의 중 그는 정의를 평가하기 위한 가장 극단적 화두를 던졌는데, 그것은 "다수를 살리기 위하여 한 명의 목숨을 포기해야 하는 결정을 해야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과연 정당한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우리의 중요한 덕목인 "착함'이란 기준으로 이러한 윤리적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규범을 잘 지킨다는  것으로 한 사람의 선함을 판단하는 방법처럼 단지 그가 국가나 회사가 정한 법과 규정을 기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가로 선을 판가름하는 것 적절하지 않다. 만약 규범을 잘 따르는 사람이 더 착하고 규범을 어기는 사람은 더 나쁘다라는 이분법적인 방법으로 선함을 판단한다면 매우 무서운 왜곡이 벌어질 수 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충실히 수행한  게슈타포, 깡패집단의 규범에 따라 경쟁집단과 패싸움을 자행한 조폭, 사이비 종교의 교리를 따라 신도를 괴롭힌 맹신도 등 이들은 자신들의 핵심 준거집단의 규범을 충실히 잘 지킨 훌륭하고 모범적 인간이 되버리는 것이다.


한 개인이 규범적으로 착하고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사회제도 상 법규을 잘 지키는 것이나 임의의 준거집단의 규범을 무조건 잘 따르는 것만은 아니다.  규범은 결국 사회속에서 만들어지고 지켜지는 것이므로 먼저 사회적으로 보다 올바른 준거집단을 선택하고  그 안에 소속되어 바람직한 규범을 따르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 또한 사회적 규범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카멜레온과도 같은 것이다.  사회가 변하면 규범도 바뀌게 마련이다. 평균적 사회인으로서 이러한 변화를 외면하고 무시하면 고리타분한 꼰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므로 사회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지혜롭게 평가하고 가려내서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자세가 훌륭한 규범인으로 우리를  선하게 살 수 있게 한다.


셋째, 인간관계적 측면에서 착하다는 것이 있다.


관계적으로 착하다는 말은 대개  내 생각보다는 타인의 가르침이나 요청을 받들고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거나 개인적 희생이 따름에도 불과하고 상대의 요구를 조건없이 수용한다면 그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고 그 말씀을 충실히 따르면 착한 아들과 딸로 거듭나는 것이고 반대로 사사건건 반항하고 거부한다면 버릇없고 삐딱한 나쁜 자식으로 낙인찍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부모의 생각을 잘 따르기만 하면 정말 착한 자식이 되는 것인가?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직장 상사의 지시를 무조건 잘 따르거나,  동료의 사소한 요청이라도 앞장서서 수용하고 맞춰준다면 당신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의 판단보다 상대의 판단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맞춰준다면 갈등은 현격히 줄어들겠지만 자신의 의견이 없는 당신을 상대방이 그만큼 존중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 다면 그건 철저한 오판이다. 자신의 존재감이 없 상대 의견과 요청의 무조건 수용은 자칫 주체성없는 어리석음으로 오판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상사의 지시를 충실히 잘 따르기 위하여 하급자를 괴롭하는 팀장이 있다면 그는 양가적 존재가 된다. 상사에게는 착한 부하가 되지만 하급자에게는 못된 상급자로 낙인되는 것이다.

 

시회적 관계에서 착함이란  그러므로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명제를 넘어서 다양한 사회적 관계속에서 요구되는 수많은 요청과 약속을 효과적으로 잘 처리한다는 것을 말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나아가 개인적 손실도 감수하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내포하고 있다. 만약 직장에서 "착하게 살기"위하여 나의 금전적, 시간적 손실이 발생해도 지속적으로 감수해야 한다면 어떨까?  "착하게"를 위해 이렇게 개인적 손실 감수가서 요구된다면 선뜻 동의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인간관계에서의 선함을 유지하는 것은 무조건적 수용과 자기 희생이 아니라 상대방의 의견을 우선 경청하고 이해하는 적극적 과정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누구의 의견이든 즉석에서 부정하지 말고 최대한 경청하는 모드를 취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상대에게 최소한의 긍정적 스탠스를 취하게 되는 것이며 상대방 또한 그러한 당신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갖게 되며  존중하는 마인드로 당신을 대하게 된다.


착함에 대한 이해에 덧붙여 기존에 내가 적은 관계맺기 ( https://brunch.co.kr/@sos/3 ) 에서 밝힌 관계의 신중한 선택 기준을 갖는 것도 안전한 삶의 중요한 삶의 나침반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말하자면 사회적 관계속에 만나는 잠재 위험으로부터 "착한" 이들을 지켜줄 안전지침서가 될 수 있겠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본성적이든 후천적으로 만들어졌든 이 세상에는 당신을 괴롭히고 끊임없이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악인" 혹은 "나쁜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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