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 그만두고 싶은 날이에요

by 낮의 그늘

엄마 난 그만하고 싶어요.

가족이 진 빚을 갚는 건 괜찮아요 그 금액이 십억 언저리인 것도 괜찮아요 대부업 회사에서 협박성 문자나 전화를 2초마다 해대는 것도 익숙해요 나는 그저 엄마 아빠가웃었음 좋겠어요 조모 때문에 이를 가느라 어금니를 잃는 게 아니라 밤에 꿈도 꾸지 않고 푹 자는 걸 바라요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면 발작하지 않고 평이한 어조로 누구세요 물을 수 있는 삶을 바라요

나는 괜찮아요 나는 전화벨소리에 심장이 터질것 같아 숨이 조이긴 하지만 당신의 공황장애보다 훨씬 괜찮아요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 몸이 빳빳하게 굳고 식은땀에 절여지곤 하지만 당신의 트라우마보다 훨씬 괜찮아요

그러니 평화로운 밤을 맞이하세요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고싶지 않아요 나는 자랑스러운 첫째이고 싶지 않아요 빚이 몇억이건 나는 그냥 당신의 어린 아이이고 싶어요 그저 당신의 보호 아래 달달떠는 한낱 애송이이길바라요

다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죠 눈에 넣어 아프지 않을 어린 남동생이 저기 있잖아요 나는 맛있는 것을 혼자 먹어선 안 되죠 한 달에 일백 육십만원 납입하면서 남은 금액은 당신의 사랑스러운 아들을 케어하는데 쓰지 않으면 안되잖아요 그는 집안을 이끌어갈 장남이니까

나는 홀로 설 수 있으면 안돼요 저기 어리고 나약한 남동생이 있으니까 그를 데려가 따듯한 밥과 국과 반찬을 내어주어야 하니까

내 돌사진은 남자용 한복을 입고 있어요, 그래, 다음엔 아들을 낳아야 했기 때문이에요 기가 세다는 말띠 첫째 딸은 운 좋게도 낙태 바람을 피해갔어요 아마 딸이 없어 그 살가움이 그리웠던 할머니의 뜻이었겠죠 그것만으로도 우리 가족에게 빚을 졌어요 날 살려둔 이유는 고작 이것인가요 ‘네 가족을 보살펴라?’

난 그만 두겠어요 말 잘듣고 착한 딸은 그 날 5층 건물 옥상에서 죽었어요 사시나무 떨듯 팔다리를 떨어대면서 갈색 화분을 딛고 올라갔어요 그래요 난 뛰어내릴 용기가 없었지만 그 날 죽을 이유는 충분했어요 내겐 또 다른 그 날이 올 거예요 우리 가족의 기분을 살피지 않고 옥상에 올라갈 그 날이요

이제 누가 내 얘길

들어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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