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낮의 그늘 Mar 29. 2023

매주 도서관 가는 일기: 오월의 기록

23.02.24


지난주에 전자책을 읽느라 대출한 책을 거의 못 봤다. 그래서 읽지 못한 두 권을 다시 빌렸다. 에세이나 소설이 아닌 책을 읽고 싶었는데 마침 출구 근처에 역사 섹션이 있어서 돌아다니다가 <오월의 기록>을 발견했다.


한국의 역사 세션엔 5.18에 관한 책이 많이 있었다. 아니, 사실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많았다. 5월을 말하는 많은 책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KBS 다큐 인사이트에서 다큐멘터리 제작기를 책으로 출판한 <오월의 기록>을 골랐다. 대출하기 전에 잔인한 장면이 있는지 쓱 훑어봤는데 그렇지 않았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의 얼굴엔 유감이 스친다. 몰랐던 것에 대한 죄책감, 오해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 혹은 그런 끔찍한 일이 발생함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표정들이다.


그런데 가끔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민군이 먼저 무기고를 털었으니 그건 그냥 폭동이지.” 그들의 역사관에 크게 관심이 없더라도 알 수 있다. ‘나는 우매한 너희와는 달리 냉정하고 통찰 있는 사람이야’,라고 말하고 싶어 근질근질해 죽겠다는 얼굴.


그러나 이들과 몇 마디 나누다 보면 이들은 5.18은커녕 다른 모든 사안에 대해 아무런 견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입맛에 맞는 경로로 수집한 단편적인 데이터이고, 그마저도 출처가 부정확하다. 본인들은 그게 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모양이지만.


이들을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 역시 5.18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이 사안에 특히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내가 광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어릴 때, 5월이 되면 으레 학교에서 5.18에 대해 배우고는 했다. 기념관에도 종종 갔다. 어린 마음에 충격받았던 기억이 있다. 계엄군에게 잔혹하게 맞아 다친 사람들의 사진이 여과 없이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항심도 있었다. 나는 좋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데, 어른들은 왜 이런 걸 보여주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자라 무지에 수치를 느끼면서 역사 서고를 기웃거리는 어른이 됐다. 무엇이 자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KBS 다큐 인사이트 <오월의 기록>은 5.18에 대한 다큐멘터리 방송이다. 그리고 책 <오월의 기록>은 다큐 인사이트 팀이 방송에 미처 담지 못한 과정을 출판한 책이다. 그동안 많은 5.18 관련 영상물들이 있었지만 일부는 날짜가 다르거나 전후 상황을 제대로 담지 못한 것들이 많았는데, 팀의 목표는 “제대로 정리된 5.18 민주화 운동 영상일지를 만들기” 였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5.18 민주화운동이 1980년 5월 18일 단 하루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5.18 운동은 5월 18일에 시작되어 5월 27일까지 총 열흘 간에 걸쳐 일어났다. 열흘 동안 잔혹한 폭력에 노출된 도시의 기록물은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고, 이를 제대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수고와 노력이 들었을 것 같다.


책의 내용은 사실상 5.18 민주화 운동의 타임라인이다. 덧붙인 말이나 사견이 과감히 제거되고 다큐 인사이트 팀에서 확보한 영상물의 캡처와 자막이 주를 이룬다. 내레이션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내가 어릴 때 5.18 기념관에서 보았던 잔인한 장면들은 나오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는 사실 위주의 내용이라 덧붙일 말이 크게 없다.




다만, 관련 문서 중 3~4세가량의 어린아이 검시서가 있는 것은 충격이었다. 사망 원인이 총상이었다는 대목에서 한번 더 깊은 충격. 묵념. 40여 년이나 지났음에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죽음이 너무나 많았다. 한마디 사과 없이 죽어버린 학살자는 이 모든 참혹을 어디로 삼켰을까? 그에게는 정말이지 이 죽음들이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선이 보상받지 않는 것은 괜찮다. 선이란 그런 거니까. 하지만 악이 징벌받지 않는 것을 볼 때마다 우주에 대해 생각한다. 40년이 지났음에도 조명받지 않는 진실은 수도 없이 많고, 일부는 악의적인 덧칠에 묻혀 빛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충분히 애도했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참사는 매일매일 일어난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걸까? 생각이 많아지는 오후을 보내며.

이전 06화 도서관 가는 일기: 차별의 언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