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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의 그늘 Mar 16. 2023

도서관 가는 일기: 차별의 언어

23.01.28


설 연휴가 지나고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반납 기한이 다 된 책들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불과 어제만 해도 영하 십 육도 언저리를 맴돌던 날씨가 많이 따듯해졌다. 휴대폰으로 확인해 보니 영하 사 도. 요 며칠간의 추위는 영하의 기온을 따듯하게 느껴지게 하는 맹추위였다.


징검다리 식으로 며칠간은 지독하게 춥고, 또 며칠은 비교적 덜 추운 날들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혹독하기까지 한 추위를 겪으며 (거기에 난방비 폭탄까지 떠맡으며) 기후위기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가 암만 열심히 해봐야 양놈들이 쓰레기 많이 버려서 도움도 안 된대’ A의 자조 섞인 농담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그냥 ‘ㅋㅋㅋㅋ’로 대체한 적이 있다. 나의 사소하고 무의미한 노력이 부끄러워 서였을까? 할 말이 많지만 오늘은 자조적 농담보다는 ‘양놈’들이라는 단어에 조금 더 주목해 본다.



우리나라의 주변국을 대상으로 한 농담은 차고도 많지만 나도 소리 내어 깔깔 웃었던 그림이 하나 있다. 당장 검색해 보니 바로 나온다.

약간 순화된 버전을 가져왔다.


우리나라는 중국을 떼놈이라고 욕하고, 일본을 왜놈이라고 욕하면서도 그들은 우리에게 우호적일 거라는 순수한 믿음. 그게 우스워서 웃었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분단국가인데, 이 그림에서 남한과 북한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가 있을 뿐이다. (아니, 북한이 사라져서 안 보이는 건가?)


왜 우리는 타국을 무시할까? ‘놈’이나 ‘새끼’를 붙여서 깔보는 것일까?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걸까?




<차별의 언어>는 언어에서 비롯되는 차별에 대해 설명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역사를 되짚어가며 독자를 이해시킨다. 대상 독자는 한국인이다. 한국인이 다른 나라와 문화를 어떤 식으로 차별하고 배제하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차별의 범위가 다소 한정적이어서 조금 실망했지만, 읽다 보니 흥미로워서 금세 다 읽었다.



책은 ‘틀린 그림 찾기’라는 게임의 이름에서 시작한다. 두 개의 그림에서 서로 다른 부분을 찾는 게임인데 왜 ‘틀린’ 그림이라고 표현할까? 그 누구도 이 게임 이름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 없을 것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한국인들에게) 차별의 언어는 깊숙이 녹아들었다. 스스로 공부해서 알아내고 내 안에서 꺼내는 수밖에 없다. 해독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인은 한국어로 사회화된 존재들입니다. 한국어로 세상을 분석하고 바라봅니다. 따라서 한국인이 쓰는 언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존재 방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은 ‘우리’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 이를 통해 한국인은 ‘우리 주의’가 매우 강한 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쓰는 편이다. 우리 집, 우리 고양이, 우리 가족…. 왜 내 집, 내 고양이, 내 가족이라고 하지 않을까? 우리라는 말의 어원이 ‘울타리’라는 이야기를 읽고 나니 기분이 묘해졌다. 이상하다. 우리 집의 계약자는 나라는 개인인데,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울타리 안을 우리라고 지칭하는 나라니. 그리고 거기에 일말의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다니!



이러한 우리 주의의 촉발점에는 한국 사람들의 괴상한 민족주의가 있다. 민족주의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까마득한 단군 시절부터 시작되었으리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우리 민족에 대한 충성심이 한국인에게 주입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라고 한다.



해방 후 삶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한국인들의 의식은 집단주의를 벗어나 개인주의로 향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 정부가 국민을 집단으로 통제하기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1960년 초, 결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진행하려는 정부의 입장에서 사람들이 나라보다 자신, 즉, 개인을 우선시한다면? 결과는 모르겠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민족주의 헌장이 한국인에게 주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1994년에 폐기된 이 국민교육헌장을 당시 모든 학생들이 무조건 전문을 외웠어야 했다. 얻어맞아가면서.


비단 국민교육헌장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금은 그 내용이 고쳐졌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선생님이 ‘국기에 대한 경례!’라고 외치면 학생들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그때야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외우기는 했지만, 고작 초등학생인 아이들에게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노라 맹세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몹시 이상하다.


여하간 나를 포함한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이런 민족주의를 어릴 때부터 학습해 온 사람들이다. 그러니 존재하지도 않는 단일민족이라는 허상에 집착하고 일상적인 차별을 행하는 것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감각. 그때에는 충격을 받긴 했어도 차별주의자와 나를 어느 정도 분리할 수 있었는데, 이 책은 그러기가 몹시 어려웠다. 그야말로 내가 쓰는 언어 전반에 녹아있는 차별에 대해 눈을 뜨는 거니까. 매트릭스의 빨간약을 먹은 것처럼.


내 안의 차별의 역사가 이렇게 깊은 줄은 처음 알았다. 언어는 존재의 기반이라고 믿기 때문에 아주 많이 충격적이기도 했다. 나만은 차별주의자가 아닐 줄로만 알았는데, 차별성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만간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


책에서는 비단 민족주의뿐 아니라 다문화가정이라는 단어에 들어있는 차별성, 스파게티는 스파게티로 부르면서 퍼는 쌀국수로 부르는 차별적 언행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마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 같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을 테니까.



2018년 책이라 조금은 시대적 감성에 뒤떨어진 느낌은 들었다. (열여섯 살 어린 신부에게 ‘꽃다운’ 나이라느니 하는 대목에서 책 덮을 뻔했다) 그러나 책이 다루는 핵심 주제는 분명히 나에게 해독의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언행에 조심하며 살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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