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25
어제 같이 사는 고양이의 송곳니 하나가 빠질 듯 덜렁거려서 잘못될까 봐 밤잠을 설쳤다. 새로운 책을 읽을 자신이 없어서 지난주에 빌려두고 끝까지 못 읽은 책을 마저 끝내기로 했다. <혐오 없는 삶>, 피부색이 다른 두 개의 손이 서로의 손가락 끝을 마주대고 마치 소통을 하는 듯한 표지의 책이다.
그 옆에 이렇게 쓰여있다. “나와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사회 문제 섹션에 있는 많은 책이 그렇듯이, 나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혐오적 표현이나 행동을 알려주리라고 예상했다. 일종의 교정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혐오 없는 삶>은 조금 달랐다. 어쩐지 낭만적이고 다정하다고 느꼈다.
책을 한 줄로 요약해야 한다면 다음의 문장을 인용하고 싶다.
문제는 어떤 사람을 진짜 알게 되면, 더는 그를 증오하지 못한다는 거죠.
그렇다. 우리의 혐오는 대상을 잘 알지 못한다는 공포에서 온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알면 알수록 그를 괴물로 보는 편견이 거두어진다. 두툼한 300 페이지가 하는 말이 그렇다. 그리고 수없는 공감이 이어진다.
저자가 독일인이기 때문에 독일, 조금 넓어져봐야 서양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지만 읽는 내내 한국의 정세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몇 년 전 배우 정우성이 티브이에 나와 난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쏟아지던 댓글 하나를 기억한다. 그런 것들이랑 살 거면 너네 집에서나 살아라?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내 생각에 정우성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 같다. 문제는 그런 댓글을 쓴 사람에게 있다. ‘그런 것들’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편견에 기초한 의미 없는 어떤 것이었으리라.
비단 그 댓글을 쓴 사람만이 문제는 아니다. 나 또한 문제의 일부이다. 나는 특정 정당 지지자들을 멍청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류의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똥멍청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되짚어보니 내가 혐오하는 특정 집단(책에서는 ‘부족’이라고 표현한다)과 진지하게 대화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한-두 마디 말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 대화 불가능한 머저리로 분류하여 함께 해야 하는 순간들을 철저히 회피해 왔던 것이다. 그야말로 숨 쉬듯 혐오를 하고 있었다. 남이 혐오를 하니까 나도 혐오로 응수해야 한다는 이상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의 혐오와 갈등을 부추기는 가장 큰 원인은 상대 집단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지만, 그 외에도 미디어가 상황을 나쁘게 만드는 원인으로 꼽힌다.
기자로서 이 부분을 인정하는 게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오늘날 언론 보도는 자신들의 역할과 정반대의 기능을 하고 있다. 언론은 사회 안에서 편견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강화하고 있다. 진상을 밝히기보다는 잘못된 히스테리를 만들어낸다.
최소한의 검증 없이 가장 먼저 알람을 울리기 위해 만들어지는 무수한 기사들. 그것이 문제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언론을 손가락질하며 기레기로 부르는 것 또한 새로운 혐오이다. 문제를 인식했다면 해결을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기레기로 불리는 부족을 만들어 조롱하는 것은 사회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책에서는 “취재할 시간이 부족할수록 기자들의 보도는 부정적이 된다”라고 언급한다. 이는 인간의 편도체 반응과 연결되어 설명을 읽다 보면 상당히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더 자세한 설명은 생략.
그렇다면 혐오 없는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책 안에 많은 선례들이 있었다.
집시를 혐오하던 한 독일인 노부부는 이웃에 이사 온 어느 집시 가족을 만나고 그들에게 도움을 건넴으로써 자신의 혐오를 벗어난 예외 집단을 만들었다. 집시는 싫지만 옆집 사는 사람들은 꽤 좋아. 정도의 수준이다.
어느 나치주의자는 감방에서 무거운 덤벨을 들어 올리려던 한 팔레스타인인을 발견하고 함께 운동을 하다 친구가 된다.
어릴 적 동성의 소아성애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한 남자는 시민의회 활동을 하며 알게 된 게이 남성을 만난다. 그는 공포를 극복하고 그를 진정으로 이해했다. 그 덕분에 동성애자라는 집단에도 공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동성부부 합법화에 찬성표를 던짐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에도 성공한다.
이 모든 긍정적 사례의 핵심은 접촉이다. 책의 표지에 있는 그림처럼, 손 끝이 아주 살짝만 닿을 정도의 사소한 접촉이라도 우리의 편견을 바꿀 수 있다. (물론 이 접촉이 성공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고, 부정적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책을 읽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기겠다.) 우리는 서로를 만나야 하고, 서로를 알아가야 한다.
접촉은 물론 두렵겠지만,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특별히 착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