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낮의 그늘 May 02. 2023

매주 도서관 가는 일기: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

23.03.25


지난 주말에 빌린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를 단 한 페이지도 읽지 못한 채 한 주가 지났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 지나치게 몰입한 탓이라고 애써 변명해 보지만, 고백건대 지난주에 술을 너무 자주 마셨다.




어제도 월급날을 기념하여   마신 탓에 아침부터 엄청나게 배가 고팠다. 도서관에 직행하는 대신  말린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도서관  건너편의 식당에 간다. 소바랑 돈가스 중에 고민하다가 돈가스를 주문했다.


, 오후 일정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밀린 독서를 해치워야 한다. 가방을 열고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 꺼내려다가아뿔싸. 소바를 주문할  그랬다는 생각에 잠시 멈칫한다.


잠시 후 테이블에 놓인 돈가스를 썰면서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를 느리게 읽기 시작했다. 소스에 죄책감이 누덕누덕 묻어났다.




나는 비건이 아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육식을 끊지 못한 사람에 속하고, 친구를 만날 때마다 육류 먹을 생각에 들뜨고 마는 사람이다.


한 때 채식에 흥미를 갖고 관련 에세이들을 찾아 읽은 적이 있는데, 꼭 한 권마다 이런 구절이 들어있고는 했다. “즐겁게 육식을 하는 상대방의 모습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 책들을 저격하려는 것은 아니니 비슷하게 퉁칠만한 문장을 새로 썼다.)


저자가 육식을 끔찍하게 여기는 대목이 등장할 때면 슬그머니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 ‘끔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쾌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평생 해왔던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불편했다. 그렇게 채식은 서서히 내게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트위터에서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이라는 단어를 접했다. 플렉시테리언은 가장 유연한 수준의 채식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채식을 지향하지만 상황에 따라 육식을 할 수 있고, 동물 복지 농장 인증 농장에서 공급하는 고기만 선택적으로 섭취하는 행위도 플렉시테리어니즘(flexitaranism)에 속한다. 이 어찌나 포용력 있는 단어인지!


이 유연성 있는 단어가 오히려 내 세계를 넓혀주었다. 완전한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오히려 채식과 나의 거리감을 줄여주었고 (단어의 힘이란 정말 놀랍다.) 그로 인해 오히려 전보다 육식 문제를 구체적으로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동물권 책을 읽을 때 느껴지는 죄책감이 ‘불쾌’ 하지 않다.




이런, 책에 대한 얘기를 너무 안 했다.

만약 이전의 나처럼 현재의 육식 문제는 알고 있지만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기엔 힘든 사람에게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는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왜냐면 책의 결론이 ‘그러니 육식을 하지 맙시다’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를 감지하고 나면 아예 회피해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제 자체를 면밀히 관찰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다.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는 후자다.



요는 ‘면밀히 관찰’함에 있다. 이를 위해 인간의 먹는 행위, 특히 육식에 얽힌 많은 이야기가 전달된다. 초반에는 설화 같은 느낌의 이야기가 많이 있어서 재미있었다. 달달한 디저트로 여겨지는 양갱이 사실은 붉은 선지 덩어리의 모양을 본떠 만든 과자라는 이야기는 특히.


그런가 하면 그가 던지는 질문이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지는데, ‘공장식 축산을 막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하는 질문에는 정말이지 어떤 답을 내놓을 수도 없다. 농가의 생계부터 시작하여, 빈부 격차에 의한 계급 문제까지. 먹는 행위가 얼마나 인류 사회의 중심에 있는지 알게 되었을 뿐이다.




마지막 장에 도달하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식용 곤충… 얘기는 살짝 흐린 눈을 하고 빨리 책장을 넘기긴 했지만. MSG로 고기 국물의 감칠맛을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내가 아는 감칠맛이 ‘고기의 감칠맛’이었다니? 그리고 마냥 무해하게 생각했던 대체육의 이면에 자리한 사회의 계급 문제도 알게 되었다.


육식은 알수록 ‘안 먹는 것’으로 납작하게 생각할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먹지 않으려면 먹지 않을 자유가 필요한데, 가난한 사람에게는 이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선택지가 없어서 가공육을 소비하는 사람은 ‘환경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나쁜 사람’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책을 읽으며 플렉시테리언으로서의 내게 몇 가지 규칙이 생겼다.


채식하는 나에 취해 타인을 비난하지 않을 것. 육류를 먹기로 결정했다면 먹히는 존재에 대해 생각할 것. 그것이 불쾌한 경험이더라도 회피하지 않을 것.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먹히는 존재를 존중할 수 있는 선택을 할 것.


내가 누군가를 죽이고 그 살을 먹는다는 사실을 먹는 내내 자각하는 것, 이것이 나의 ‘육식의 모럴’, 목숨을 잃은 동물에 대한 예의입니다.
외할아버지는 인간으로서 소에게 최소한의 의리를 지키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요즘 나는 육고기를 먹을 때 사육과 도축 과정을 떠올리는 것도 먹히는 자에 대해 의리를 지키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밥을 먹으며 농사짓는 분의 노고를 떠올리는 일과 비슷하게 말이에요.


우리는 먹는 존재이고 무얼 먹을지 선택한다.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육류를 먹기로 결정했다면 먹히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불쾌한 경험이 되더라도.

이전 08화 매주 도서관 가는 일기: 혐오 없는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