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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의 그늘 Jan 16. 2023

도서관 가는 일기: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생각합니다.

22.12.17

오늘 빌린 책 : 고양이 집사 매뉴얼, 담배와 영화,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생각합니다, 하루 5분의 초록






요즘은 클래식이 좋다.


뜬금없이 클래식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시작은 작년의 일이다. 가난의 굴레를 끊고 보통의 삶을 꿈꾸던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나를 위한 소비를 하는 것이었다. 사고 싶었던 것들을 잔뜩 사거나 쌍꺼풀 수술을 하고 싶기도 했고 긴 여행을 떠나고 싶기도 했는데, 평생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 지출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 삶과 가장 거리가 먼 분야인 음악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막연히 피아노면 되겠지 하고 학원을 알아보려 산책을 나갔다가 바이올린 학원 간판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 바이올린은 처음 배우기 쉽지 않다는, 살짝 만류하는 듯한 선생님의 말에 그렇구나 하고 빈 손으로 나왔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그 바이올린 학원에 등록했다. (지금 생각해도 의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됐지?)


처음 1년 동안 내 바이올린에서는 굉장한 소리가 났다. 끼긱대거나 쉭쉭거리거나, 아니면 아무런 전조 증상 없이 삑! 하고 울거나를 반복했고…. 그런데 1년쯤 지나고 나니 그 소음을 내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일단 재미를 붙이고 나니 취향이 확장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마른 장작에 불붙듯 클래식의 역사나 작곡가의 전기 등을 찾아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클래식이 취미가 된 것이다.







뭔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검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분야도 그렇다(어쩌면 더 심할지도). 작곡가는 얼마나 아는지, 곡의 양식을 분석할 수 있는지, 절대 음감은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까다로운 귀를 가졌는지, 역사적 지식과 검증되기는 했는지 모를 야사들에 대한 질문들…. 그들은 실컷 물음표 살인마 같은 짓을 하다가 결국 이런다.


“뭐야, 진정한 음악을 모르네.”


그 뒤에는? 자기가 생각한 이상적인 음악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진정한 음악이란 이런 것이죠! 글쎄, 제가 물어봤던가요. 몇 번 그런 사람들을 만난 이후로는 어디 가서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혼자 좋아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혼자’라고 해도 책과 유튜브의 도움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래서 책장 맨 꼭대기 칸에서 어렵사리 찾은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생각합니다>는 빌릴 때 다소 기대감이 컸고 다 읽은 감상은 기대보다 더 좋았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쓴 책을 만나서 설렜고, 또 그 사람이 함께 음악을 생각하자고 해줘서 기뻤다.


대체 왜 그런 것이 궁금하냐고요? 글쎄요… 제 개인적 대답도 괜찮으시다면… 재미있어서요!


대학에서 음악사를 가르치는 사람이 쓴 음악 책, 이라는 서문을 읽을 때만 해도 잔뜩 긴장했다. 음악에 통달한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나라는 뉴비에게 호통을 쳐댈까 봐 쫄았던 것이다. 그런데 첫 페이지만 읽어도 정 반대의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제일 좋아하던 교수님의 수업에 맨 앞자리를 차지했던 과거의 나로 돌아간다. 교수님. 빨리 시작해주세요!


진정한 음악이란 이런 것이죠.. 죠.. 죠죠죠를 남발하는 어느 온라인 사이코패스와는 달리 저자는 꽤 심오한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좋다. 그 결말이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다를지라도. 생각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 만든다.




나는 ‘원래 그래’라는 말을 아주 싫어하는 것으로 (한 줌정도 되는 내 지인 사이에서) 독보적이다. 그 말을 듣는 즉시 반박하고 싶어서 명치 아래가 근질근질하다. 원래가 뭔데? 언제부터 원래였는데? 왜 반대로 하면 안 돼? 조금이라도 비틀면 안 돼? 내게만 있다고 생각했던 반항적 기질이 저자에게서 발견되었을 때의 기쁨이란! 아래의 문단을 읽으면서 책과 저자가 더욱 좋아졌다.


그러나 상식은 자연의 법칙이나 당위적 명제가 아닙니다. 상식은 어떤 역사적 계기로 인해 ‘그렇게 여겨지게 된 것’ 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상식의 역사성’이라고 할까요? 음악과 관련된 상식의 역사성 말입니다. “원래 음악은 이런 거야” “음악은 원래 이렇게 듣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할 때 그 ‘원래’가 도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그 ‘원래’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어떤 조건과 환경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클래식에는 이런 것들이 많다. 당연히 곡이 쓰인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하고, 작곡가의 국적에서 시작해서 악기의 기원, 연주 방법… 당연히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이 클래식 입문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왜 알아야 하는데? 그냥 듣기만 하면 안 되는 거야? 이유 없이 느낌이 좋아서 좋아하면 진정성이 없는 거야? 이런 질문을 입문자인 내가 하면 그냥 어리석은 자의 치기로밖에 안 보인다. 그런데 그 말을 교수님이 해주신다면?


게다가 제법 발칙한 사실은, 클래식 공연은 조용히 관람해야 한다는 ‘원래 그래’를 이 음악 학자가 부정한다는 것이다.



모차르트 연주회를 그린 그림을 보면 연주자들을 제외한 관람자들, 그러니까 귀족들이 대부분 식사 중인 것을 볼 수 있다. 앙코르곡 전에는 셔벗을 대접하기도 했다고 하니 진짜 ‘원래’는 달칵달칵 소리를 내면서 간식도 먹고, 구석에서는 춤을 추기도 하며, 사업 얘기든 뭐든 대화를 나누기도 하면서 자유롭게 공연을 관람했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심지어 이 그림 앞에는 강아지도 두 마리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근엄하게 선언하는 ‘클래식 감상은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는 언제부터 원래였을까? 그 과정에는 물론 시대적 변화 등이 있었을 테지만, 엄숙히 ‘원래’를 선언하는 것보다 이렇게 음악을 감상하는 방법은 어떤 게 최선일까를 고민하는 쪽이 훨씬 내 취향인 것은 사실이다.


그 외에도 미국에서 왜 악보를 music이라고 부르는지, 바흐는 왜 음악의 아버지인지, 틀린 음악이란 존재하는지 등등, 음악에 대한 다양한 질문과 시선이 여기에 있었다. 단순히 지식을 주입하는 책들에게도 고맙지만 역시 이런 책은 발견 즉시 보물처럼 여기게 된다.


한 시간도 못 되는 시간 동안 <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생각합니다>를 단숨에 읽어치웠다. 오늘은 딸기가 콕콕 박힌 생크림 케이크 한 조각도 함께였다. 이토록 가볍고 달달한 주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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