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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의 그늘 Jun 14. 2023

매주 도서관 가는 일기: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

23.04.22


오늘따라 도서관에 가기 싫다. 그냥 침대 위에 드러누워서 고양이나 쓰다듬고 싶었다. 비 올 듯 흐리던 어제와는 달리 해가 쨍하니 떴고 바람은 선선했다. 사라진 줄 알았던 봄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렇게 완벽한 날에는 정말이지 집에 틀어박히고 싶다.


억지로 몸을 일으킨 탓인가,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기도 쉽지 않았다. 망설이다 뽑아 든 책을 펼치면 단번에 실망스러운 문장이 보였다. 새로운 책을 꺼내어 실망하고 다시 꽂아 넣기의 반복. 어쩐지 확 느껴지는 끌림 없이 의무감만으로 책 세 권을 대출해 나왔다.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는 호통치는 제목과는 달리 자전적 요소가 많은 책이었다. ‘뇌성마비 환자는 심리 치료사가 될 수 없다’며 연구 과정 이수를 거부당한 이후 장애인 인권 운동가가 된 해릴린 루소의 성장기록이다.


“나를 대단하게 여기지 말라”는건 “나를 연민하지 마라”는 말과 같다. 주변에서 장애인을 찾아보기 힘든 이 사회에서 그들을 볼 수 있는 곳은 아주 한정적인데, 그중 하나가 미디어이다.


그러나 미디어가 장애인을 다루는 시각은 아주 납작하다. 미디어 속 장애인은 모두 착하고 순수하고, 말미에 장애를 ‘극복’한다. 여기에 ‘정상인’으로 묘사되는 주변인의 도움은 필수적이다. 미디어가 조명하는 이런 장면은 ‘장애인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존재’라는 편견을 강화한다.


 가상의 인물이 아니더라도 장애를 ‘극복하고훌륭한 일을 해낸 실존 인물의 서사는 언제나 화제가 된다. 책도 나오고 영화로도 만들어진다. 충격, 감동실화  이런 타이틀을 달고.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고 그들의 열정을 칭찬하며 심지어는 존경한다. “정말 대단하지 않니!”




그러나 실존하는 장애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떨까?


우선 우리나라는 장애인이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사회가 그들이 돌아다니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당장 서울시만 해도 장애인들을 위한 엘리베이터 설치를 거부하고 있다(뭔 등신같이 생긴 이상한 건물은 세우고 싶어 하면서).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지하철을 타는 것도 싫어한다. 단순히 그 정도의 시위조차도. 그들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이 회사에 지각을 하기 때문에 지지하지 않는단다. 이 쪽도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들 하다.


이런 악의 가득한 케이스를 제외해 볼까. 장애인을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당장 나만해도 그게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길가의 휠체어를 발견하면 ‘뛰어가서 도와드려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한다. 그것이 진짜로 필요한지는 글쎄. 직접 물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는 정확히 장애인을 이렇게 대하세요, 하고 가이드하지 않는다. 오히려 뇌성마비 환자로서 살아온 자신의 삶을 늘어놓은 것에 가깝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 지루한 부분도 있어서, 몇 개의 챕터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읽었다.


해릴린 본인도 자신의 뇌성마비를 받아들이는 데에 몇십 년이 걸렸다고 한다. 본인조차 자신은 ‘정도가 심하지 않은’ 뇌성마비 환자로 분류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날 때면 그들과 자신을 분리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장애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다가도, 거리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깜짝 놀라 거부한다.


나는  몸을 보통 사람들의 신체와 다르고 불완전하며 ‘고쳐줘야 대상으로 보는 사회적 인식에 동화되기 전까지는  몸을 그저  육신, 내가 지니고 태어난 껍질, 완전하고 온전하며 부족한  없는 신체로 인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몸에 대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에 대한 갈등은 그런 상충하는 시각에서 생겨났다.  자신에게는  몸이 아무렇지 않은데, 세상 사람들로부터  몸이 정상적인 몸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받아온 결과다.







내 삶에 눈물을 짜낼만한 구석은 하나도 없다. 나를 보고 저렇게 눈물을 찔찔 짜는 사람들을 자꾸 마주친다는 것 빼고는.



장애가 있으니 삶이 힘들겠다… 는 생각은 순전히 장애가 없는 사람의 편협한 시각이다. 해릴린의 말처럼 장애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몸은 그저 몸이다. 그러니 그들이 무슨 일을 하든 당신이 눈물을 짜며 ‘정말 대단하세요!’라고 손뼉 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불쑥 다가와 눈물을 훔치며 ‘네가 참 자랑스러워.’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처음엔 당연히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생의 전반에 걸쳐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끝내는 작작 좀 하라고, 나는 그냥 내 삶을 살고 있을 뿐이라고 소리를 지르게 될지도 모른다.



장애인을 연민하는 시각은 순전히 그들은 비정상이고 비장애인은 정상이라는 생각에서 나온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혜적인 태도로 내려다보는 것이다. 연민, 배려, 도움… 단어에겐 죄가 없으나 그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호기심을 갖거나 특별히 동정하는 사람에게는 잘못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칭찬한 건데 왜요?”라는 생각이 들면 무조건 읽어야 할 책이다.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를 읽으면 그게 왜 잘못인지 제대로 알 수 있다. 특히 그녀가 주는 1달러를 거부하는 거지가 나오는 부분. 그 짧은 페이지를 읽으며 사회가 참 체계적으로 멍청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정상에 대한 근거 없는 환상이다. 누가 정상인가? 이동하기 위해 휠체어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휠체어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게 하는 사람. 휠체어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사람과 그들 때문에 자기가 손해를 입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정상과 비정상을 가를 수 있을까? 가를 수 있다면 그 기준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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